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위기에 놓였다. 올해 초부터 <미나리>의 외국어 영화상 후보 지명, 운영 주최의 불투명하고 불공정한 관행 운영 등으로 논란을 빚어온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대해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와 방송국은 물론 스타들과 홍보 에이전시 협회에 이르기까지, 골든 글로브의 편협하고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운영 방식을 규탄하는 영화인들의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는 상황. 이에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주최하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 이하 HFPA)에서 개혁안을 내놓았으나, ‘오스카의 영원한 들러리’ 노릇도 이제 끝난 것 같다는 비관적인 예측이 우세하다. 정말 시상식은 폐지 수순을 밟게 될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둘러싼 몇 가지 논란과 쟁점을 정리했다.
선정 기준 논란
올해 2월 초,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주최하는 HFPA는 후보작을 발표하면서 자국 영화인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지명해 다양성 결여, 차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영어 대화가 50%를 넘지 않으면 외국 영화로 간주한다는 자체 규정 때문이었다. 과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는 적용되지 않은 터라 형평성 논란도 함께 일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부문 후보작의 작품성에 있어서도 선정 기준 논란을 가져왔다. 2020년 해외 여러 비평가협회 시상식에서 주목받았던 스파이크 리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다 5 블러드>가 어디에도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 샘 레빈슨 감독의 데뷔작 <맬컴과 마리>의 주연배우 젠데이아 콜먼이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 영국 아카데미 TV 시상식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2020년의 화제작 HBO 시리즈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가 어떤 부문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 등의 이슈를 만들어내며 흑인 영화인이나 흑인 소재 작품을 배제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주인공은 <노매드랜드>와 <미나리>였다. 중국 출신 감독 클로이 자오는 감독상, 작품상을 수상했는데 아시아인 여성감독으로서는 최초의 감독상 수상이었다.
불투명한 운영 의혹
지난 2월 21일, LA타임즈는 HFPA 구성원의 내부 활동에 대한 조사를 벌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발표했다. 부패한 관행이 발견됐고, 협회 회원 중 흑인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협회 회원 중에 시상식 입장권을 39,000달러(한화 약 4,400만원)를 받고 외부에 판매한 사실도 적발당했다. 이 보고에 따르면 HFPA 회원 중에 다른 위원회 참석 목적으로 2백만 달러를 지출한 사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촬영장 방문 목적으로 30명의 회원이 파라마운트사로부터 파리의 5성급 호텔인 페닌슐라 호텔 2박 숙박을 제공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이처럼 오랫동안 업계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영화제작사와 스타들을 상대로 특혜를 요구한 사실 등이 드러났고 시상식 운영 및 협회 구성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됐다.
할리우드가 뒤흔들린다
할리우드 내에서 다양한 자성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HFPA는 5월 3일, 회원 수를 늘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할 수 있는 컨설턴트를 고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86명의 회원 중 75명의 회원이 이 개혁안에 합의했음이 알려졌다. 알리사르 HFPA 회장은 "협회를 개혁하기 위한 오늘의 압도적인 표결은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넷플릭스의 테드 사란도스 CEO가 “더 의미 있는 개혁이 제정될 때까지 HFPA와의 협업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타임즈 업 CEO인 티나 첸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타깝게도 개혁안은 매우 미흡하고 바뀌는 게 거의 없다. 현재 회원국이 다수 유지될 것이며, 근본적인 문제가 다음 시상식에서도 계속 이어질 거라고 보장하는 수준 밖에 안 된다. 구체적인 책임이나 변화에 대한 약속,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계획이 없다."고 비판했다. 넷플릭스를 따라 제작 스튜디오들이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아마존 스튜디오, 워너 브라더스, HBO가 HFPA를 보이콧하겠다고 발표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매년 중계하던 ‘NBC’ 방송국도 HFPA가 발표한 이 개혁안이 충분하지 않다면서 내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중계하지 않기로 발표했다. NBC는 "HFPA가 제대로 변화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면서 “2022년에는 시상식을 중계하지 않을 것”이며 “2023년에는 방송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워너미디어의 경영진은 NBC의 발표가 있기 하루 전에 협회 총재에게 성명서를 보내 "HFPA는 오랜 기간 동안 우리 팀과 업계 전반에 걸쳐 특권적이고 비전문적인 요구를 해왔다. 사실 우리는 불만이 있으면서도 이를 용인해왔다.”면서 "회원 확장에 할리우드의 창작자들과 스토리가 담아내고자 하는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을 반영하지 않는 한, 협회는 업계 최고의 인재들을 가려내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100개 이상의 할리우드 홍보 에이전시들로 구성된 연합에서도 “HFPA의 오랜 배타적 사고방식과 만연한 차별적 관행, 비전문적 행태, 도덕, 윤리적인 부적절 행위, 토착적인 재정 부패를 근절하기 위한 개혁을 제정할 때까지” 홍보 요청을 거절하기로 했다.
스타들도 나섰다
골든 글로브의 여러 의혹과 논란에 대해 스타들도 한 목소리를 냈다. 5월 초,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언론에 성명서를 내고 HFPA가 "하비 와인스타인처럼 아카데미에서 인지도를 올릴 목적을 지닌 이들의 합법적 조직”이라고 비판하며 “근본적인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한 이 조직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HFPA 회원들이 던지는 질문과 발언 중에는 “성추행에 해당하는 말들이 있어서 답변을 피해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올해 열린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아이 노우 디스 머치 이즈 트루>로 TV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마크 러팔로도 온라인 매체 ‘데드라인’에 시상식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는 “나의 수상에 대해 어떤 자부심이나 기쁨도 느낄 수 없다”면서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라고 변화를 촉구했다. 영화 <제리 맥과이어><7월 4일생>으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두 번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매그놀리아>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톰 크루즈는 자신이 받은 3개의 골든 글로브 트로피를 모두 주최 측에 반납했다.
시상식이 폐지된다면?
배우 맷 데이먼은 투데이 쇼에 나와 "그들이 사라진다면, 아무도 그 사실을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 저는 이 시상식의 폐지에 대해 전 세계가 나서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HFPA 회원들이 주축이 된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산업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수익원이었다. 각종 영화사, 배우 에이전시는 시상식 후보에 오르면 수상을 위해 수백만 달러의 비용을 홍보비로 쓰고 수상했을 시에는 박스오피스 성적으로 되돌려 받았다. 마케터들은 보너스를 받았고, 또한 시상식은 스타들의 개인 수익 증대에 기여해왔다. 시상식이 없어진다면, 일단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재정적 여파가 엄청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시상식을 통해야만 다양한 홍보 효과를 노려볼 수 있는 독립 영화나 외국 영화, 장르적으로는 코미디, 뮤지컬 영화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상식이 사라질 때 이득을 보는 쪽은 누굴까. 지난 2017년, 해시태그 #oscarsowhite 논란을 겪으며 일찌감치 다양성 추구에 박차를 가해 왔던 아카데미 시상식 입장에서는 골든 글로브의 몰락이 자신들의 변화의 의지를 더 돋보이는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기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