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 그리고 김은희 작가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작업의 비기를 공개했다. 괴담을 주제로 한 극영화·시리즈를 전문가 멘토링, 마스터클래스 등을 통해 개발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제작 지원 프로그램 ‘괴담 캠퍼스’를 통해서다. 올해 영화제 개막(7월 8일)에 앞서 열린 괴담 캠퍼스는 지난 4월 미리 공모를 열고 108편 중 8편 작품 및 창작자를 엄선했다. 포스트 나홍진·김은희를 꿈꾸는 이들과 두 창작자의 마스터클래스는 영화제 공식 유튜브를 통해 7월 13일, 14일에 공개된다.
나홍진 감독, 당신의 ‘피’가 시키는 대로 나아가라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의 <랑종> 제작 및 각본가로 활약하며 올여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나홍진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일약 독한 기운을 뿜으며 등장했다. 연쇄살인마와 형사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담으며 한국 스릴러 영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추격자>(2008), 연변과 서울을 잇는 이주노동자의 하드보일드 액션 <황해>(2010), 관람 열풍과 함께 나홍진 세계의 무시무시한 확장을 알린 <곡성>(2016)까지, 나홍진 감독은 만드는 작품마다 화제를 몰고 왔다.
화상 통화로 마련된 이번 마스터클래스에서 나 감독은 <5 미니츠>(2003) <완벽한 도미 요리>(2005) 등 영화계 입봉 이전에 단편영화를 연출하던 시기를 찬찬히 돌아봤다. 그는 “단편영화를 만들고 시베리아 벌판에서 시나리오를 습작하는 행위는 필요한 것일까” 자문한 뒤, “무조건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는 연출과 각본 집필을 습작하는 단계에서 “작품이 어딘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드는 순간을 절대 놓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오든 절대 손을 놓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라. 어떻게든지 덧칠을 하고, 실수를 지워보려 노력하고, 무언가를 더해보려고 한다면 처음 실망감을 안겨줬던 작품만큼 안 좋은 결과가 다시 나올 일은 없다.”
커리어 초입에 있는 감독 지망생들의 수많은 고민 중 하나는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분석의 대상이 될만한 특정한 형식, 스타일, 자기 작품을 이루는 방법적인 유사함이 존재하는지 자신 또한 오래 고민했다고 밝힌 나홍진 감독은 결과적으로 “요즘엔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나 감독은 이어서 창작자들이 “각자 자신이 갖고 태어난 ‘피’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그답게 오싹한 지론을 이어갔다. “당신의 피가 어떤 피인지 그 피의 가치를 믿고, 그 피가 시키는 대로 나아가라.” 이어서 대상을 바라보는 정확한 시선과 자기다움의 균형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어떤 현상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시선은 세상의 너무나 많은 시각들 속에서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만 명심하면 된다. 나머지는 본인의 재능을 믿고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며 나아가길 바란다.”
끝으로 나 감독은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일한다는 것에 대해 “감독이 기획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프리 프로덕션과 캐스팅, 촬영과 후반 작업을 마친 뒤 개봉까지 이어가는 마라톤 게임”이라고 묘사했다. “그냥 미쳐야 한다”는 게 나홍진이 바라보는 영화감독의 숙명이다. 다만 ‘미쳐야’ 가능한 그 일을 나홍진 감독은 ‘그냥’ 하고 있다. “다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봐달라”고 주문한 나홍진은 코엔 형제의 영화에 빗대어 감독 지망생들에게 이런 위로를 남겼다. “그냥 가는 겁니다. 그냥… 언젠가는 저 끝에 빛이 보이리라 믿으셔야만 합니다.”
김은희 감독, 쓰고 또 쓰고 쉼 없이 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세계를 다루며 수많은 이들의 인생 드라마로 자리매김한 <싸인>(2011), 사이버 수사대를 조명한 <유령>(2012), TV 드라마의 장르물 전성기를 연 타임슬립 형사극 <시그널>(2016), 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쏘아 올린 조선 시대 좀비물 <킹덤>(2019~2021) 시리즈 등 장르 드라마의 귀재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김은희 작가는 요즘 방송계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이름 중 하나다. 7월 23일 공개되는 <킹덤> 시리즈의 스페셜 에피소드 <킹덤: 아신전>, tvN 방영 예정인 <지리산> 역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 7월 1일 부천아트벙커B39에서 열린 김은희 작가의 마스터클래스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거장, 한국의 아가사 크리스티의 남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 작가의 장항준 감독의 사회로 진행됐다. 마스터클래스 초입에서 김은희 작가는 샘솟는 영감과 아이디어의 원천부터 공개했다. 한 달에 약 20~30권을 읽는다고 밝힌 김 작가는 “얕고 넓은 독서”를 그 비결로 꼽았다. “한 권을 읽다 보면 관련 주제에 대한 의문이 생겨서 결국 세 권을 더 사게 된다”는 게 그의 독서 습관. 의학, 지리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대서가의 독서는 김정호의 지도첩 <대동여지도>를 참고해 <킹덤> 시리즈의 조선 시대를 구현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김은희에게도 신인 작가 시절의 고충은 여지없이 똑같았다. <위기일발 풍년빌라>(2010)로 각본 데뷔한 그는 주변의 한숨과 혹평을 들으며 1년 반 사이에 무려 12고에 이르는 탈고 과정을 거쳤다. 김 작가에 따르면 실력 향상의 방법은 “쉬지 않고 쓰고 또 쓰는 것” 뿐이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커리어 초창기에 고생하는 게 낫다.” 김은희 작가는 이 날 자료조사부터 모니터링에 이르기까지 집필 과정에서 쌓은 실질적인 노하우도 아끼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만 나온 건 뜬구름 잡는 소리다. 사극이든 현대극이든 취재와 고증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작가의 부지런함을 강조한 그는 아직 신인 작가에 가까웠던 <싸인> 집필 당시에 법의관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일화도 털어놓았다. 기획 및 초기 집필 단계에서는 “출연하는 인물, 나이, 직업 캐릭터부터 정리하며 1회의 구성과 시놉시스를” 가장 먼저 정리한다. 사건 위주로 매회를 나열하기보다는 “감정선에 대한 구상”을 우선시하는데,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면 “아침 7시쯤 무언가 풀리는” 글쓰기 시간이 비로소 찾아온다.
대본이 궤도에 올라도 안심하긴 금물이다. 듣는 자세의 균형 감각을 당부한 김은희 작가는 너무 쉽게 쓰인 대본, 뻔하고 재미없는 장면을 경계하되 쏟아지는 모니터링 속에서도 “작가의 중심은 지켜야 한다”고 내공을 드러냈다. 김은희 작가는 <시그널>을 기획할 당시, 초기 대본을 본 방송사가 무전기 설정을 빼고 현재의 이야기로만 압축하자고 제안한 일화도 소개했다. “무전기를 빼면 ‘시그널’이 ‘시그널’이 아니게 돼서 장항준 감독에게 물으니 ‘네 생각이 옳다’고 했다.” 장항준 감독 또한 “기성 창작자들의 틀을 깨는 것, 내 생각이 맞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중요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마스터클래스에서는 김은희 작가의 신작 <지리산>에 대한 힌트도 나왔다. 장항준 감독이“신작에도 여전히 살인이 중요하게 등장하냐”고 묻자 김 작가가 “많이 죽긴 죽더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크리스마스에 지리산 구조대는 어떤 모습일까,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지리산에 오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아이디어를 출발했다”는 김은희 작가는 “본래 영화나 단편으로 구상했던 것이 쓰다 보니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됐다”고 전해 기대감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