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바깥에서 들려오는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노크 소리를 대신했다. 16살의 싱그러운 기운은 금세 주변의 공기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였다. 이제 막 패션과 뷰티에 호기심을 갖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는 이레는 베레모에 안경까지 멋스럽게 쓰고 나타나 마치 <안녕? 나야!>의 반하니와 같은 텐션으로 “본 투 비” 배우의 모습을 보여줬다. 올해 상반기 방영된 드라마 <안녕? 나야!>에선 17살의 반하니와 37살의 반하니를 최강희와 2인1역으로 연기하며 드라마 첫 주연을 맡았다. 극중 이름처럼 모두를 반하게 만드는 자기애 가득한 10대의 반하니는 당돌하고 거침없다.
사실 이레의 에너지도 그 못지않다. “낯가림이 풀리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텐션이 치솟고,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땐 밝고 쾌활하고 도전하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작 스스로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이렇게 밝은 캐릭터를 연기하기에 내 목소리 톤이나 성격이 잘 맞을까” 걱정이었다는데, 캐릭터와의 싱크로율과 상대 배우와의 호흡을 깊이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반하니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아직도 <안녕? 나야!>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느낌”이라고.
능수능란하게 다양한 감정 곡선을 타넘는 이레에게 새삼 놀랄 필요는 없다. 3살 때부터 잡지 모델로 활동을 시작한 이레는 카메라와 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잘하는 것도 일찍 깨쳤다. “어릴 적에 TV를 보면서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저기(TV) 안에 있어야 하는데 서울에서 연락 안 왔냐고. (웃음) 지금 생각해도 믿기 힘든 놀라운 나르시시즘이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였다.”
이준익 감독의 <소원> 오디션 때도 어린 이레의 순수한 자기애와 자존감은 빛을 발했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이 있었고 이준익 감독은 이레에게 “여기서 울어야 돼” 하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레는 “여기선 안 울어도 될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사실 오디션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막상 현장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 눈물이 안 나오네. 어떡하지? 그런데 차마 눈물이 안 나온다고 말할 수 없어서 여기선 울지 않아도 충분히 감정 전달이 가능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이준익 감독님은 그런 나를 믿어주셨는데, 감독님께 정말 감사하다. 첫 영화 첫 시작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이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선 미니 봉고차 생활을 면하기 위해 친구들과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강구하는 10살 지소를 연기해 관객의 마음을 훔쳤고, 연상호 감독의 <반도>에선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터프하게 차를 몰며 생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시크하고 의젓한 준이를 연기해 한껏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운전면허를 따려면 아직도 몇년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운전대를 잡고 폐허로 변한 도시를 질주하는 <반도> 속 이레의 모습은 무척 프로페셔널했다. 배우가 아니었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세상에서 다채로운 인물로 살아보고, 그 과정에서 “나도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일은 이레가 배우라는 직업에 120% 만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주일만 쉬어도 얼른 연기가 하고 싶어진다”는 이레는 현재 9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홈타운>을 촬영 중이다. <홈타운>에선 테러범(엄태구)의 딸이라는 만만치 않은 캐릭터를 맡아 엄태구, 한예리 등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보다 앞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의 촬영도 마쳤다. 연상호 감독이 연출하고 유아인, 박정민 등이 출연하는 <지옥>에선 형사 역을 맡은 양익준의 딸로 나온다. 지옥의 사자들에게 지옥행을 선고받는 사람들, 미스터리한 종교단체와 얽힌 사건들 등 초자연적 요소로 가득한 작품이라 <반도>의 좀비월드보다 더 새로웠다고 한다. “작품이 무겁고 어두워도 캐릭터에 빨리 몰입했다 빨리 빠져나오는 연습이 돼 있어서 촬영이 끝나면 ‘와, 퇴근이다’ 싶고, 어두운 감정은 생각할 틈이 없다”는 이레는 프로 중의 프로다.
첫 연기의 기억
“드라마 <굿바이 마눌>의 단역이 첫 연기였는데,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강박감도 없어서 현장이 너무너무 재밌었다. 카메라나 조명도 신기했고.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아 신났다.”
롤모델
“전지현 선배님과 앤 해서웨이. 연기의 스펙트럼을 보면 존경스럽다. 작품마다 캐릭터 변화가 유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언젠가 나도 저렇게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배우들이다.”
10년 후 나의 모습
“예전엔 ‘난 훗날 엄청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안녕? 나야!>를 찍고서 생각이 바뀌었다.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나를 상상하기보다 현재의 나에 집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