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미션이었다. 6대 제임스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는 <007 카지노 로얄>(2006) 캐스팅 당시, 금발의 제임스 본드는 있을 수 없다는 전세계 영화 팬들의 극렬한 반대를 딛고 보란 듯이 시리즈의 도약을 이끌었다.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를 시작으로 조지 레이전비, 로저 무어, 티머시 돌턴, 피어스 브로스넌을 거치면서 세계는 포스트 냉전 시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더이상 현실에서는 제임스 본드만 막을 수 있었던 핵무기의 위협, 체제 전복을 꾀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위협, 인류를 자신의 발아래 놓으려는 허무맹랑한 범죄자들의 위협을 느낄 수 없는 시대가 됐다고 여겼다. 게다가 9·11 이후 직면한 테러의 위협 속에서 IMF 소속의 에단 헌트나 CIA의 제이슨 본, 잭 라이언 등의 캐릭터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임스 본드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는 섹스와 폭력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했다. 살인면허의 유효기간이 끝나갈 무렵 어렵사리 등장한 대니얼 크레이그가 이룬 성과는 놀라웠다. 그의 시리즈 세 번째 출연작 <007 스카이폴>(2012)은 전세계 수익 11억달러를 넘기며 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뒀다. 영화 제작비도 해를 거듭할수록 5천만달러 이상씩 증가했다. 1억5천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007 카지노 로얄> 이후 <007 스펙터>(2015)의 제작비는 2억달러가 넘었고,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버라이어티>의 2020년 기사에 따르면 순제작비만 3억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젠 정말 뼈가 아파서” 제임스 본드를 더 연기할 수 없을 거라고 공공연히 밝혔던 대니얼 크레이그의 마지막 미션은 반대를 무릅쓰고 등판했던 <007 카지노 로얄> 때만큼이나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몇 차례나 개봉을 미룬 영화는 2020년 3월에 이미 6600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마케팅 비용을 지출한 상태였다. 제작사인 MGM 스튜디오는 현재 매달 100만달러의 이자를 내고 있다. 할리우드의 거대 스튜디오들이 OTT 서비스와 손잡고 어떻게든 손실을 메우려는 상황에서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극장 개봉을 고집했다. ‘007 시리즈’의 전세계 배급권을 갖고 있던 소니픽처스와 결별하고 손잡은 유니버설 픽처스의 첫 시리즈 배급작이기도 한 이번 영화에 할리우드의 수많은 큰손들의 운명이 걸려 있다. 말 그대로 제임스 본드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라스트 댄스
제임스 본드의 창시자인 작가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데 성공한 제작사 이언 프로덕션의 프로듀서 바버라 브로콜리와 마이클 G. 윌슨은 대니얼 크레이그를 내세워 거대한 프랜차이즈의 역사를 새로 쓰는 시도를 했다. MI6 소속 요원 제임스 본드가 ‘더블오’라 불리는 살인면허를 처음 얻게 되는 <007 카지노 로얄>은 이언 플레밍이 생애 처음 쓴 소설이 원작이었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요원 ‘007’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스파이 세계의 지독하지만 단순한 철칙이었다. 그는 <007 카지노 로얄>에서 테러 조직의 자금줄을 캐다가 알게 된 르쉬프(마스 미켈센)가 꾸미는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 과정에서 재무부 회계사 베스퍼(에바 그린)와 사랑에 빠지지만 베니스에서 베스퍼를 잃는다. 르쉬프의 자금과 연관된 회사 그린플래닛의 CEO 도미닉(마티외 아말리크)이 꾸미는 티에라 프로젝트가 볼리비아의 군사정권을 쥐락펴락하기 위한 행위였고 여기에 CIA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본드는 도미닉이 속해 있는 조직 ‘퀀텀’의 실체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되는데 이것이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의 이야기다.
애초 이언 프로덕션은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를 1, 2부로 묶인 한편의 영화로 계획했다. 살인면허를 얻자마자 맡았던 첫 번째 임무에서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사랑을 잃자 본드는 복수심에 불타고,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건 거대한 범죄 조직의 뿌리를 뽑는 일뿐이다. 베스퍼와 얽힌 모든 사건의 공모자를 잡아들인 그를 또다시 위기에 빠뜨린 건 자신과 같은 조직에 몸담았던 전직 요원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의 MI6 해체 계획. 비밀요원 명단을 해킹해 공개하고, 런던에 잠입해 MI6를 무너뜨리고 M(주디 덴치)을 살해하려던 실바와의 싸움 끝에 <007 스카이폴>에서 드러난 사실은 실바 역시 어떤 조직의 일원이었으며 그 조직은 본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연관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문장에 스포일러가 있다. <007 스펙터>에선 자신과 형제처럼 지냈던 후견인의 아들 오버하우저(크리스토프 발츠)가 ‘스펙터’라 불리는 거대한 범죄 조직의 수장이며 지금껏 그가 쫓던 모든 악당이 이 조직의 일원이었음을 알게 된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본드가 오버하우저를 체포하고 은퇴한 뒤 사핀(라미 말렉)이라는 새로운 악당이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연기하는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 영화이기에 이번 영화에서 세대교체를 암시하는 무언가가 등장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시리즈의 세대교체?
캐스팅에서부터 이미 세대교체를 예감케 한다. 본드의 막역한 동료인 CIA 요원 펠릭스의 뒤를 잇는 요원 팔로마(아나 데 아르마스), 본드와 같은 살인면허를 지닌 2년차 요원 노미(라샤나 린치)가 등장한다. 살아 있는 더블오 요원이 한 화면에 잡히는 건 시리즈 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007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1962년작 <007 살인번호>의 악당 닥터 노(조지프 와이즈먼)의 의복과 흡사한 옷을 입고 등장하는 사핀의 예고편 속 실루엣에서 이미 이번 영화가 지난 60여년의 역사를 압축하듯 오마주할 거란 사실을 알 수 있다.
2020년 대니얼 크레이그는 영국의 <톱기어> 매거진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가 “<007 카지노 로얄>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사건을 마무리짓는다”고 말했다. 은퇴한 본드를 현장 복귀시킨 사건에는 아마도 스펙터는 물론, 자신이 사랑했던 베스퍼를 위기에 빠뜨렸던 미스터 화이트(예스페르 크리스텐센)의 딸이자 본드의 새로운 연인 매들린(레아 세두)과 사핀의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을 것이다. 비밀요원의 잔인한 숙명을 받아들인 제임스 본드의 마지막 미션은 예고편 영상으로 짐작건대 이탈리아, 쿠바,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영국 등이 배경일 것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로 대니얼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에서 은퇴하지만 정말 본드가 죽는 장면이 등장할까. 아니길 바란다. 그와의 작별 인사는 오직 극장에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