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제임스 본드 티머시 돌턴은 앞선 3대 제임스 본드 로저 무어가 일군 명성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티머시 돌턴의 제임스 본드는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둡고 쓸쓸한 다크 히어로와 같은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그가 처음 등장한 <007 리빙 데이라이트>(1987)에서 제작진이 내세운 본드카는 ‘애스턴마틴 V8’ 쿠페였다. 1970년대에 등장한 이 차는 시속 270km까지 밟을 수 있는 인상적인 최고 속도와 가속력 덕분에 영국 최초의 슈퍼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영화에 첫 등장하던 시기에 세계 시장에서는 올드한 퇴물 취급을 받았다.
그래도 제작진이 티머시 돌턴과 함께 애스턴마틴 V8를 내세운 이유는 고전적인 근육질의 형상 때문. 캐리 후쿠나가 감독은 대니얼 크레이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등장할 차로 애스턴마틴 V8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런데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예고편에서는 회전 번호판, 탈출용 시트, 기관총을 탑재한 ‘DB5’ 모델이 <007 스카이폴>에 이어 다시 한번 등장해 방탄유리와 기관총의 성능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V8’ 모델은 일촉즉발의 현장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세운 장면에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제작진은 이번 영화에서 본드카 애스턴마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끔 클래식한 첫 번째 본드카 DB5 모델과 슈퍼 GT카 ‘DBS’, 아직 출시도 안된 최신 하이브리드 V8 버전 ‘발할라’ 등 4개 모델이 모두 등장한다고 발표했다. 당연히 시리즈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960년대, 애스턴마틴사는 처음 007 시리즈의 출연 제의를 받고 선뜻 결정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막 출시한 차를 영화에 등장시켰다가 잘못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차량의 성능이 너무 뛰어나 촬영에 애를 먹은 일이 있었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길에 버려진 베스퍼를 피하려던 본드의 차가 전복되는 유명한 장면을 찍을 때 일이다. 애스턴마틴 DBS를 그럴싸하게 전복시키기 위해 스턴트 촬영팀에서 시속 100km 속도로 45도 각도의 경사판을 밟고 지나가도록 도로에 특수 장비를 설치했는데 차가 전복되지 않았다. DBS 모델의 접지력이 너무 좋았기 때문. BMW로 테스트할 때는 데굴데굴 굴렀는데 말이다. 무게중심이 낮은 스포츠카와 다름없었던 애스턴마틴 DBS의 내부에 압축 공기로 지면을 때려 강제로 넘어가게 하는 장비를 추가 설치한 다음에야 전복 신을 촬영할 수 있었다. 덕분에 촬영하는 동안 차가 7바퀴나 굴러가 기네스북 촬영 부문에 오르기도 했다. 애스턴마틴이 제임스 본드 덕분에 명품차의 명성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