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제임스 본드는 원래 조류학자였다? 알고 보면 더 재밌는 007 시리즈 비하인드
2021-09-29
글 : 김현수

제임스 본드는 조류학자였다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

작가 이언 플레밍이 영국 해군 정보실 전역 후 자메이카로 건너가 책을 쓸 무렵, 그가 창조한 상상 속 비밀요원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는 당시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의 저서 <서인도제도의 새들>(A Field Guide to Birds of the West Indies)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이 차분한 인상을 줘 허락 없이 가져다 썼다. 이언 플레밍은 자메이카에서 머물던 집을 ‘골든아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제임스 본드는 미국 스파이였다

이언 플레밍은 1953년 제임스 본드 주연의 첫 소설 <카지노 로열>을 집필한 뒤 반응이 너무 없어서 제작 판권을 헐값에 넘긴다. 미국 <CBS>는 요원의 국적을 미국으로 바꿔 1954년 TV시리즈를 만들었다. 이언 플레밍은 이 작품을 대단히 싫어했으며 영화계에 환멸을 느낄 정도였다고.

007 시리즈는 모든 걸 내건 이들이 만들었다

시리즈 사상 가장 어둡다는 평을 들은 <007 살인면허>는 재평가받을 만한 명작이다.

1962년 숀 코너리 주연의 <007 살인번호>가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당시 이언 플레밍은 소설 집필이 너무 힘들어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의 소설을 간절히 영화화하고 싶었던 제작자 커비 브로콜리와 해리 샐츠먼은 우여곡절 끝에 제작 판권을 겨우 구매했지만 돈을 다 써버려 제작비가 없었다. 이때 이들이 만든 프로덕션 이름이 ‘이언 프로덕션’이다. ‘Everything or nothing’을 마음에 새기며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찾아간 두 사람은 판권계약 만료 시점을 며칠 남겨두고 100만달러라는 엄청난 제작비 유치에 성공했다. 이후 제작자와 영화사 모두 돈방석에 앉게 됐다.

다사다난했던 제임스 본드 캐스팅

6대 제임스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

1대 본드 숀 코너리의 캐스팅 당시, 영화사는 노동자 출신의 근육질 배우보다는 할리우드의 미남 스타를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블라인드 캐스팅 심사에서 많은 여성이 그를 섹시하다고 평가해 무사히 캐스팅됐다. 숀 코너리는 자신의 인기에 비해 출연료가 적다는 불만과 제작자 커비 브로콜리와의 불화 때문에 하차한다. 차기 본드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은 무명의 호주 출신 조지 레이전비는 자신을 경력 많은 배우라고 속여 오디션까지 보게 된다.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그는 성공에 취해 문란한 사생활을 즐겼고 히피의 상징 <이지 라이더>(1969) 같은 영화가 대세라면서 자진 하차한다.

3대 본드 로저 무어는 가장 안정적인 캐스팅 과정을 거쳤지만 천성이 너무 고와 유니세프 친선대사인 자신이 영화에서 태국 소년을 물에 밀어 빠뜨리는 장면을 찍는 걸 너무나 괴로워했다. 4대 본드인 티머시 돌턴은 당시 최고 인기 TV시리즈였던 <레밍턴 스틸>과의 계약 관계 때문에 캐스팅될 수 없었던 피어스 브로스넌의 대타였다. 결국 그는 두 작품 만에 스스로 하차했고 제작진은 다시 피어스 브로스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새로운 본드 역할로 노련한 경력자의 이미지를 원했기 때문. 9·11 테러 이후 세계 정세가 바뀌면서 주로 공산권 국가 세력과 대결을 펼쳤던 피어스 브로스넌의 본드는 시대 변화를 감지, 하차하고 대니얼 크레이그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금발의 제임스 본드는 말도 안된다며 제작 발표회 당시 크레이그는 기자들로부터 염색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조명을 잘 치면 어두워 보인다”고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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