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여름!>은 펠릭스(에릭 낭트슈앙)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좇아 남프랑스 휴양지로 친구 셰리프(살리프 시세)와 함께 떠나는 이야기다. 청춘들의 로드무비이자 흐뭇한 코미디 또는 성장담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장르, 패턴, 규격에 맞춰 설명하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20세기 거장 에릭 로메르 영화의 21세기 버전”(<가디언>)이란 평처럼 기욤 브락 감독은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에서 특별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다. 2011년 <여자 없는 세상> 이후 짧은 시간 동안 세계영화계의 사랑을 받아온 기욤 브락 감독의 신작 <다함께 여름!>에는 지금 이 순간 주어진 것들에 대한 충만함으로 가득하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며, 사람과 사랑 사이에 피어난 대화엔 삶의 진심들이 알알이 맺힌다.
<다함께 여름!> 속 청춘들의 만남은 계속 어긋나고 실패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들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고민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내일은 더 씁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고민하는 대신 눈앞에 주어진 감정에 솔직할 수 있도록 따뜻한 시선으로 이들의 현재에 동참한다. 수시로 만나고 헤어졌던 인물들이 캠핑장 노래 바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나눌 때 더이상 말은 필요치 않다. 그 순간의 충만함은 언어 바깥에 있으며 오직 영화를 관람하는 당신을 향해 열린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초청되어 관객과 만난 <다함께 여름!>은 올해 국내 개봉과 함께 부산영화제에서 특별상영의 시간을 가졌다. 지난해에는 화상으로 관객과 만났지만 올해는 기욤 브락 감독과 관객이 직접 마주보며 생생한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어쩌면 코로나19로 막연한 불안과 피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꼭 끌어안으며 위로를 전할, 적절한 도착이다.
- 지난해 부산영화제 때 <다함께 여름!>을 상영했는데 직접 못 오고 온라인 GV로 만났다.
= 그동안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모습을 통해 한국을 접해왔다. 이번에 직접 와서 접한 모든 분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팬데믹 상황을 실감했다. 일본에선 전작들도 모두 개봉했지만 한국에선 <다함께 여름!>이 처음이다. 좀더 일찍 오지 못하고 이 시기에 방문한 게 조금 슬프지만 이런 시기임에도 영화를 선보일 수 있어 감사하다.
- 원제는 <À L’abordage>이다. 직역하면 해적들이 적선에 오를 때 지르는 함성, ‘승선하라’ 정도가 되겠다.
= 여름 휴양지에 모여든 다양한 청춘 군상에 대한 영화다. 서로 다른 배경의 젊은이들이 함께 여름을 보내고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어 제목도 어울리는 것 같다. 원제는 아이들이 장난칠 때 쓰는 ‘돌격!’ 같은 느낌인데, 이동이나 여행, 모험을 떠나는 역동적인 감정이나 움직임이 좀더 강조됐다.
- 제목만 보면 전작 다큐멘터리 <보물섬>(2018)의 연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실제로 이번 영화 제목은 <보물섬> 촬영을 할 때 고려했던 제목 중 하나다. <보물섬>이 아이들이 동네에서 모험하는 상황이었다면 <다함께 여름!>은 좀더 나이가 있는 청년들이 처음으로 떠나는 휴가라는 점에서 연결고리가 있다. 이번 영화는 프랑스의 CNSLT라는 국립연극원에서 의뢰를 받아 시작했다. 한번도 연기를 해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을 위한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거였다. 소재나 상황 등 아무것도 없이 배우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흥미로워 시작했다. 본래 부유층 애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였지만 몇해 전부터 저소득층 학생들도 받아들였고 덕분에 다양한 배우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배우를 찾았다기보다는 인물을 만났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30명 정도의 학생들을 만나 인터뷰를 나누고 그중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인간적으로 끌리는 10명을 선정해 작업했다.
- 대부분의 경우 배우란 감독의 상상을 정확히 구현해주는 역할인 반면 당신의 영화에서는 영감을 주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쪽에 가깝다.
= 맞다. 보통 시나리오를 쓰고 캐스팅을 하지만 나는 이제껏 그런 순서로 작업한 적이 없다. 이번 영화에서도 학생들을 여름에 만났고 그다음 해 여름에 촬영이 잡혀 있었다. 1년 내 진행해야 하는 제한된 조건이 좋은 자극제였다. 첫 인터뷰 때 나눈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짜나갔고, 두 번째 인터뷰 때 디테일을 구체화시켰다.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실제 대사로 쓰기도 했다. 내가 배우를 대하는 태도는 감독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단편은 물론 <여자 없는 세상>(2011)이나 <토네르>(2013)를 찍을 때도 배우이자 친구인 빈센트 맥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시작한 거다. 배우는 내 창작욕의 대상이다. 인물의 속마음이나 내밀한 이야기가 섞여 있는, 어쩌면 배우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좋겠다.
- 당신의 작업은 픽션과 다큐멘터리, 그 사이에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분명 창작된 것이긴 하지만 실제의 존재를 대상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지금 여기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처럼 담아낸다.
= 내게 있어 영화는 어떤 인물이나 장소를 바라보는 행위다. 그건 픽션이건 다큐멘터리이건 마찬가지다. 다큐를 찍을 땐 현실 속에서 캐스팅을 하고, 픽션을 찍을 땐 실제 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창작한다. <보물섬>은 실제로 본 상황을 단순히 그대로 찍기보다는 때때로 재현된 상황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함께 여름!> 역시 아이들의 솔직한 고백이 영화의 재료가 된 만큼 원래 가지고 있던 것과 지어낸 부분이 경계를 넘나들며 섞여 있다. 결국 이 모든 건 내게 감동을 주는 것, 감동받은 것들에 대한 관찰인 셈이다.
- 같은 맥락으로 장소가 주는 생생함이 있다. 보통 이야기에 필요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당신의 영화에선 장소가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재밌는 표현이다. 인물이 없이 영화를 구상하기 힘든 것처럼 장소가 정해지지 않으면 시나리오를 쓰기 힘들다. 다만 내게 특별한 애정이 있는 장소라야 할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거나 나의 러브 스토리가 담겨 있거나. (웃음) <다함께 여름!>의 드롬강 유역은 몇주 동안 휴가를 보낸 곳이다. 거기서 내가 아빠가 될 거란 사실을 알았다. 딸이 탄생한 특별한 장소라 영화에 나오는 건 필연이었다. 강, 캠핑장, 노래 바 등 장소의 분위기는 최대한 그대로 담으려고 했다. 영화를 찍고 나서도 그곳에 여러 번 갔는데 그때마다 영화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다.
- 실제로 있는 캠핑장이고 영화를 나중에 찍은 건데 갈 때마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란 표현이 재미있다. 영화와 현실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갓난아기인 니나 역에 딸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는데.
= 처음 영화를 할 때부터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흔적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10년 전에 찍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최근에 와서 자신의 청춘이 담긴 모습을 다시 보며 감회에 젖어드는 걸 접하고 감동받았다. <다함께 여름!>의 출발은 학교측의 요청이었지만 배우들의 사연을 들으며 점점 애착이 생겼고,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딸을 출연시키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이야기의 씨앗 중 하나가 딸의 탄생이었던 만큼 딸의 어린 시절 모습을 영화를 통해 평생 남겨주고 싶었다. 촬영할 땐 8개월 정도였다. 딸의 출연이 결정된 후 배우들도 이번 영화에 대한 나의 애정을 확인하고 더 끈끈해졌다.
- 클로즈업이 거의 없고 대부분 미디엄이나 와이드숏이다. 인물의 대화를 담을 때 숏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한컷 안에 두 인물을 어떻게 공존시킬 것인지를 고민한다.
= 프레임은 매우 중요하다. 인물들간의 상호작용, 혹은 인물과 장소의 관계에 대해 담고자 했기에 클로즈업은 쓸 수 없었다. <보물섬> 촬영 때도 인물들의 살아 있는 순간들을 담고 싶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펠릭스, 셰리프, 에두아르(에두아르 술피스)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인간관계에 능수능란하지 않다. 상대에게 가까워지고는 싶은데 방법이 어색하다. 어설프지만 상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은 간절하다. 그 순간을 담기 위해선 단순하고 순수한 프레임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 <보물섬> 이후 전작들과의 변화가 보인다. <여자 없는 세상>이나 <토네르>에서의 투숏은 언제 분열될까 하는 불안감이 깔려 있는 데 반해 <보물섬> 이후로는 인물들이 갈라져도 금방 다시 만날 것 같아 왠지 안심이 된다. 어린이용 풀장에 있는 것 같은 안정감이랄까. 물가에 있어도 불안하지 않다.
= 초기작에 비해 <보물선> 이후의 영화들은 좀더 즐겁고 가벼운, 빛이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아마도 인물들의 나이대 때문이 아닐까 싶다. <토네르>는 30대 이후, <보물섬>은 아이들, <다함께 여름!>은 청년기의 인물들을 다룬다. 다음 영화가 어떤 색을 띨지는 인물의 나이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아마도 좀더 연령대가 높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고, 그만큼 어두워질 수도 있다.
- 갓난아기는 영화의 분위기를 상당 부분 부드럽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셰리프의 경우 외형도 마치 아기처럼 포동포동한데, 모두가 수영을 할 때도 갓난아기와 셰리프는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 거기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한 건 아니지만 재밌는 해석이다. (웃음) 물에 들어가기 위해 노출을 할 때 인물의 내밀한 면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셰리프 역의 살리프 시세는 또래보다 정신적으로 더 어린데 점점 자신의 욕구에 눈을 뜬다. 입고 있는 의상, 특히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아이> 속 티셔츠 문양이 3번 정도 바뀌는 데 그걸 통해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활기 넘치는 펠릭스로 이야기를 시작해 다소 소심한 셰리프로 끝나는 구성도 이들의 변화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주길 마음에서다.
- 인물들은 두명씩 짝을 지었다가 다시 갈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난처해지거나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통해 웃음이 피어난다.
= 이번 영화는 처음부터 재밌게 밝게 가고 싶기도 했지만 촬영하면서 배우들의 반응이나 분위기에 감화되어 애초에 구상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상황으로 연출된 부분이 있다. 연출자로서 나의 긴장감과 압박을 풀기 위해서 촬영장에서는 최대한 즐겁게 작업하려고 한다. 그런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된 부분이 있다.
- 웃음을 목적으로 이야기를 만든 게 아니라 상황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지는 쪽에 가깝다.
= 맞다. 이들의 웃음 코드는 각 인물들의 어설픔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 강도 조절을 못한다. 때론 너무 갑작스럽고 때론 너무 수줍은, 적정선이란 걸 모르는 미숙함이야말로 이들의 매력이다. 어설프지만 뭔가 해보려고 할 때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가까이서 보면 웃기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이건 슬픈 이야기다. 이들은 계속 실패했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그리 낙관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미리 침울해하는 대신 순간의 감정을 충실하게 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