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배우들을 보는 것 자체가 마법
2021-10-20
글 : 이주현
사진 : 오계옥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드라이브 마이 카> 봤어?” 대답이 예스이건 노이건, 곧 다음 질문이 뒤따른다. “그러면 <우연과 상상>은?”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를 어떤 식으로든 경유했다. 상영작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단숨에 표가 동나버린 올해 부산영화제 최고의 화제작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앞서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칸국제영화제에서 각각 심사위원대상과 각본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뿌렸다. <해피 아워>(2015), <아사코>(2018) 이후 더욱 정교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심화, 확장하고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를 부산에서 만났다. 일본영화의 현재이자 미래인 그에게 3편의 단편을 묶은 <우연과 상상>,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그러나 거의 창작에 가까운) <드라이브 마이 카>의 마법 같은 순간들에 대해 물었다.

- 10월7일에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 두편의 영화 상영 뒤 관객 과의 대화(GV)를 했고, 이어서 봉준호 감독과의 흥미진진한 스페셜 대담도 성황리에 마쳤다. 관객의 반응을 온몸으로 느낀 부산에서의 하루는 어땠나.

= 봉준호 감독과의 대담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관객 역시 따뜻하게 환대해준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3시간짜리 영화(<드라이브 마이 카>)나 단편영화 모음(<우연과 상상>)을 좋아해주는 팬들이 있을까 싶었다. 이런 영화를 즐길 기회도 사실상 많지 않은데, 관객이 영화를 열심히 즐기는 게 느껴져 덩달아 열심히 대화에 임했다.

-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예사로 만들던 당신의 단편 모음이라는 점에서 <우연과 상상>은 그 시작의 계기가 궁금한 프로젝트다.

= 기본적으로 단편영화 만드는 걸 무척 좋아한다. 단편 작업은 지금까지 해온 작업에 대한 복습도 되고 다음에 만들 작품에 대한 예습도 된다. 장편에 비하면 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장편영화를 완성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시간을 조금 덜 들이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단편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3편의 단편을 하나로 묶으면 극장 개봉을 할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그러면 배우들도 더 동기부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이었던 건 내게는 <해피 아워>를 함께한 인디펜던트팀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준비한다면 시간도 절약하고 작품의 완성도도 챙기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 단편영화와 장편영화는 작업의 과정, 규모, 목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우연과 상상>은 어떤 목표로 임한 작품이고, 이전의 장편 작업과는 무엇이 달랐나.

=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은 같다. 단편과 장편 사이에 별 차이는 없다. 글을 쓸 때의 느낌은 비슷한데, 단지 장편영화엔 여러 인물이 등장하 니까 관계도 복잡해지고 파생되는 이야기도 복잡해진다. 단편영화는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의 수가 적다. <우연과 상상>에서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은 두 사람의 대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이들의 관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더불어 연출의 기본을 단련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우연과 상상>은 마법 같은 순간들로 채워진 영화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택시 안 대화 장면에서부터 그 마법이 시작된다.

= 기본적으로 배우들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마법 같다. 배우를 통해 텍스트가 다른 느낌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내게는 마법 같은 순간이 다. 클라이맥스 장면이 중요하다는 건 감독도 알고 배우도 안다. 그래서 모두가 집중해서 클라이맥스 장면을 찍게 된다. 오히려 평범한 장면에서 배우들이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택시안 대화 장면이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이 ‘이건 즉흥적으로 찍은 건가요?’ ‘이 대사는 시나리오에 있는 건가요?’ 라고 묻는데, 장면 속 대사는 모두 시나리오에 있었다. 사람들이 즉흥적이라고 느낀 건 그만큼 그 장면이 자연스러웠다는 뜻일 텐데, 나역시 그런 반응이 흥미롭다.

- 얘기한 것처럼 택시 안 대화 신은 시나리오상에선 평범한 장면으로 보였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의 머릿속에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구체적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었나? 아니면 현장에서 배우들과 소통하며 만든 장면인가.

= 최근엔 거의 후자의 방식으로 찍는다. 시나리오를 쓸 땐 텍스트에만 집중한다. 어떻게 이미지를 연출해야지, 어떻게 숏을 구성하고 찍어 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이것저것 시도해본다. 배우 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놀랄 때가 있는데, 그런 놀라운 순간들을 포착해 오케이 컷을 만들어간다. 현장에서 텍스트가 어떻게 바뀔지 기대하는 게 최근의 작업 방식이다.

- 스토리보드 작업은 하지 않나.

= 하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찍을 땐 베드신에서만 러프하게 준비했다. 베드신의 경우 스탭과 배우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카메 라에 찍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스토리보드를 준비했다. 그외 장면에선 준비하지 않았다.

- <우연과 상상> 두 번째 에피소드의 교수실 장면에서도 긴장감 넘치는 대화 장면이 등장한다. 제자가 교수가 쓴 소설의 한 대목을 길게 읽어 나가 는데, 소설의 내용이 불러일으키는 성적 긴장감, 상황의 긴장감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 유일하게 두 번째 에피소드의 그 숏은 구상하고 찍었다. 성적인 내용을 낭독하는 여자가 있고, 그걸 듣는 지위 높은 남자가 있고, 그 교수 실을 지나치는 복도의 사람들이 있다. 친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이장면을 구상했는데, 대학교수인 친구가 말하길 요즘은 연구실 문을 항상 열어놓는다고 하더라. 갑자기 성폭력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했다. 문을 닫아놓 으면 변명할 여지조차 없기 때문에. 영화엔 문 열린 교수실이 있고,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방 안에서 진행되는 상황은 사람 들이 알면 창피하고 안 좋은 일이다. 교수는 이 상황을 멈춰야 하지만 제자의 낭독에 매료돼 낭독을 중지시키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면 안되지만 그 순간을 지속하는 것에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게 두 번째 에피소드다.

-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공통적으로 문학과 희곡의 텍스 트를 낭독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연과 상상>을 찍은 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낭독의 활용이나 영화 외의 텍스트 활용법을 더 확장해봐야겠다고 생각했나.

= 낭독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두 작품은 얘기한 것처럼 연결되어 있다. <우연과 상상>을 만들 때 <드라이브 마이 카>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작품이 영향을 주고받은 부분이 있다. 단편에서 시도했던 것들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한번 더 시험해보고 싶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한밤중 달리는 차 안에서의 대화 장면. 두 번째 에피소드의 성적 표현에 관한 연출. 세 번째 에피소드의 연기를 한다는 것에 대한 요소들. 그런 것들을 장편에서 더 깊이 다뤄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마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위해서 <우연과 상상>을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아니 다. <우연과 상상>은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배우들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찍은 작품이다. 누군가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우연과 상상>이 훨씬 좋아요, 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내를 잃은 연극 연출가 겸 배우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그의 운전기사로 동행하게 되는 미사키(미우라 도코)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영화엔 이야기 속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고, 다른 하나는 죽은 아내가 쓴 드라마다. 본래의 이야기와 이야기 속 이야기가 정교하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데, 여러 이야기를 핸들링하는 과정은 어땠나.

= 어렵지 않았다. 가후쿠도, 미사키도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들이 아니다.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가후쿠의 무의식과 내면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서 비교적 대사를 편하게, 빨리 썼다.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는 희곡 <바냐 아저씨> 속 인물인 바냐 아저 씨와 소냐의 관계에 빗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바냐 아저씨>가 <드 라이브 마이 카>를 이끌어줬다고 생각한다. 인물들을 표현할 때 활용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있어서 작업 과정이 수월했다.

- 가후쿠는 연극 <바냐 아저씨>에 캐스팅된 배우들과 대본 리딩을 할 때 감정을 싣지 말고 천천히 대사를 읽으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대본 리딩을 한다. 이런 연기 연출법은 실제 당신이 영화를 만들 때 배우들에게 적용하는 방법과 닮았나.

= 닮았다. 실제로 배우들에게 감정을 배제하고 대사를 읽게 하고, 빨리 읽었다 천천히 읽었다 속도를 바꿔가며 읽게 한다. 그 이유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배우들에게 소리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다. 상대의 소리를 듣는 것. 아무 생각 없이 듣는 게 아니라 의미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소리도 기억하고 상대의 소리도 기억하면서 대사를 반복 해서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나는 배우들에게 상황을 미리 상상하고 준비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내 생각에 연기를 할때 가장 큰 문제는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면서도 그걸 모르는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감정을 빼고 속도를 달리 해서 반복해서 읽는 훈련을 하다 보면 그러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된다.

- 영화에 등장하는 빨간색 자동차 사브 900의 존재감도 확실하다. 그런데 사브의 핸들은 왼쪽에 있다. 일본의 도로 사정과는 반대되는 핸들 위치인 데, 거기서 비롯되는 재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나.

= 일단 일본의 차는 오른쪽 핸들이 맞는데, 일본에도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이 많다. 외제차는 기본적으로 왼쪽 핸들이고, 핸들의 위치를 의식하진 않았다. 외제차를 타는 건 가후쿠의 취향, 취미, 성격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 영화에 3명의 한국 배우 박유림, 진대연, 안휘태가 출연한다. 한국 외에도 대만, 필리핀 등 다국적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외국 배우들과 다국적 언어로 소통하며 영화를 만든 경험은 어땠나.

= 걱정은 없었다. 외국어 대사의 의미나 그 뉘앙스의 차이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소리를 들으면 소리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배우의 눈빛과 신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외국 배우들의 연기가 문제없이 잘 표현되었는지는 현지 관객이 잘 알 수 있을 거다. 이를테면 한국 배우의 연기는 한국 관객이 더잘 판단할 수 있다. 다행히 배우들에 대한 칭찬을 들으니 작업이 잘됐구나 싶어 안심이다.

-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반응도 궁금하다. 혹시 들은 게 있나.

= 시사회에 초대했는데 오진 않았다. 따로 영화를 봤다고 하고, 재밌게 봤다고 전해 들었다.

- 현재 준비 중인 작품은? 더불어 지금과 같은 작업 속도를 계속 기대해도 좋을까.

= 코로나19 때문에 개봉 시기가 밀려 한해 두편의 영화가 상도 받고 개봉도 하게 됐다. 사실 1년에 2편씩 개봉하는 건 특별한 일이고, 그렇 게까지 속도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지금으로선 준비 중인 작품이 없다. 이제부터 생각해야 한다. 영화를 지속적으로 찍고 싶지만 서둘러 찍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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