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한 감독들을 전적으로 지원해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배창호 감독) 한국의 1세대 영화 제작자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가 지난 10월 24일 별세했다. 향년 83살. 이태원 전 대표는 지난해 낙상 사고를 당한 뒤 약 1년 7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최근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 함께 트리오로 활동하며 <서편제> <춘향뎐> <취화선> 등을 제작하고,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 감독상 트로피와 ‘대한민국 최초 서울 관객 100만명’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승부사이자 모험가. 영화계의 거목 이태원 전 대표의 부고에 시대를 함께한 영화인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감독의 영역을 존중해준 제작자
이태원 전 대표에게 영화는 운명과도 같았다. 다만 그가 처음부터 오롯이 영화 제작의 길을 걸은 건 아니었다.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 전 대표는 한국전쟁 때 가족과 떨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0대엔 장돌뱅이 일로 고등학교 학비를 벌었고 스무살 이후론 ‘조직’에 몸담았다. 그러던 중 1959년, “제작 일이 잘 맞을 것 같다”는 한 무역업자의 권유로 영화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처음 제작한 영화 <유정천리>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건설업과 군납업체 일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부도가 난 친구를 도울 요량으로 매입한 건물에서 이 전 대표는 운명처럼 극장을 만난다. 해당 극장을 운영하며 영화 배급을 시작했고 1983년 태창영화사를 인수해 태흥영화사로 이름을 바꿔 본격적으로 제작 일에 뛰어들었다. 훗날 이 전 대표는 “젊었을 때 제작했던 경험이 모르는 사이에 깊게 남아 결국 영화 일을 하게 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1984년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부터 2004년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까지, 20여년간 태흥영화사가 발표한 작품은 37편에 이른다. 한해 평균 한두 작품을 쉼 없이 제작해온 셈이다. 태흥영화사의 시작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 전 대표는 태흥영화사의 창립작으로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를 야심차게 준비 중이었는데, 불교계의 거센 반발로 결국 제작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이어 제작한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가 26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어우동>과 <뽕>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태흥영화사는 제작사로서의 입지를 바로 세웠다.
이 전 대표는 임권택, 이두용 등의 ‘큰 감독’ 외에도 이규형, 이명세, 장선우, 김유진과 같은 당대 신인들의 가능성을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은 <우묵배미의 사랑>을 인상 깊게 본 이 전 대표가 차기작을 제안해 완성된 것이다.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은 단 한 장면의 설명만 듣고 제작을 결정한 작품이었다. “감독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제작자”라는 감독들의 공통된 답변처럼, 이 전 대표는 일단 영화 제작이 결정되면 경력에 관계없이 창작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다. “상품은 내 거지만, 작품은 감독 거”라는 제작자로서의 굳은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곽지균 감독의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규형 감독의 <어른들은 몰라요>, 감독·배우·스탭 모두 신인을 기용한 김용태 감독의 <미지왕> 등 태흥영화사만의 실험적이고 개성 강한 작품들은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비구니>의 아픔을 뒤로하고 이 전 대표는 “남들 못해본 것을 하자. 칸영화제 한번 가보자”라며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시작으로 <장군의 아들> <장군의 아들2> <장군의 아들3> <서편제> <태백산맥> <축제> <노는 계집 창> <춘향뎐> <취화선> <하류인생> 등 두 사람이 함께한 작품은 11편에 이른다. 특히 인기에 힘입어 연달아 세편의 시리즈가 제작된 <장군의 아들>은 이 전 대표가 임 감독에게 직접 제안한 작품이었다. 정작 감독 본인은 액션영화 연출을 망설였으나, 일찍이 그의 역량을 파악한 이 전 대표의 과감한 제안이 정확히 들어맞은 것이다. 좋은 소식은 연이어 들려왔다. “작은 영화를 해보자”는 이 전 대표의 말에서 시작된 <서편제>는 ‘최초의 서울 관객 100만명’이란 역사적인 스코어를 기록했다. 또한 “칸영화제 한번 가보자”던 이 전 대표의 제안대로, <춘향뎐>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임권택 감독은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배우 조승우가 합류한 <하류인생> 역시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기대를 모았으나 최종 스코어는 다소 부진했다. <하류인생>을 계기로 이 전 대표는 “나의 시대는 끝났다”며 제작자의 위치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2007년 다시금 임권택 감독과 함께하려던 <천년학>의 제작도 끝내 무산됐다.
한국영화사의 선봉에 서다
이 전 대표는 영화 제작과 더불어 한국 영화산업을 보호하는 데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98년 한미투자협정에서 미국이 스크린쿼터제 폐지를 요청하자 국내 영화인들이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는데, 그 선봉에 선 이 중 하나가 바로 이 전 대표였다. 그는 임권택 감독, 김지미 배우와 함께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의 공동위원장으로 나섰다. <춘향뎐>이 개봉하고 <취화선>의 칸영화제 수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스크린쿼터가 무너지면 미국 영화업계가 한국영화계를 초토화할 것”이라며 영화인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그 결과, 양국의 입장 차이로 스크린쿼터제 폐지는 결국 유보됐다.
2003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임권택 감독은 “<하류인생>은 이태원 사장의 삶의 에피소드를 인용해 만든 작품”이라 밝혔다. 거칠게 거리를 누비다 한국의 격변기를 통과하며 영화 제작자, 건설업자의 길을 걷는 주인공 태웅(조승우)의 모습은 이 전 대표의 삶에 새겨진 굴곡을 짐작게 한다.
1980~90년대 한국영화사의 중심에 선 태흥영화사는 시대의 변화를 오롯이 견뎌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 전 대표는 흥행 성적과 제작비에 굴하지 않고, 감독의 감각을 믿으며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흥행물도 나와야 하지만 그것만 하면 영화는 없어진다”면서 영화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강조한 이태원 전 대표. 오늘날 한국영화의 발전은 이 전 대표가, 그리고 태흥영화사가 치열하게 달려온 20여년의 세월이 비옥한 토양이 돼줬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전 대표는 떠났지만 그가 제작한 37편의 영화는 여전히 관객의 곁을 지키고 있다.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이 전 대표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