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화의 신전으로 오세요
2021-11-10
글 : 임수연
개관 앞둔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투어, 미국 최대 규모에 해당하는 1300만점의 유물이 보여주는 영화 제작의 모든 것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의 루비 슬리퍼, 알프레드 히치콕이 <싸이코> 시나리오를 썼던 타자기, <스타워즈>의 R2-D2, H. R. 기거의 <에이리언> 캐릭터 디자인,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잭 스켈링톤의 머리, <드라큘라>에서 벨라 루고시가 입었던 망토,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 썰매 그리고 <죠스>에서 쓰인 1200파운드 무게의 상어 모형까지. 배우 톰 행크스는 이 공간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큰 매직 랜턴”이라고 묘사했다. “다른 도시에도 영화 박물관이 있지만 이곳은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장소가 될 것이다.” 9월30일 개관한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Academy Museum of Motion Pictures)에 아카데미 회원들을 포함한 저명인사들은 그들의 컬렉션을 기증하거나 기꺼이 대여했다. 가령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 썰매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박물관에 빌려준 것이다. 미국 최대 규모에 해당하는 1300만점의 유물은 연기, 애니메이션, 캐스팅, 촬영, 의상 디자인, 연출, 편집, 분장, 마케팅, 음악, 프로덕션 디자인, 시나리오, 사운드 믹싱, 시각효과에 이르기까지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총망라한다. 공식 오픈에 앞서 9월21일(현지 시각 기준) 일부 관계자들과 프레스를 위해 공개된 기자회견과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투어에 참석했다.

#OscarsoWhite #MeToo 논의를 포함하여

박물관은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만들어진 후 2년 뒤였던 1929년, 이사회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회장은 박물관 설립을 의논한 바 있다. 1950년대에는 월트 디즈니와 잭 워너가 박물관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실제로 착수된 것은 2011년에 이르러서다. 2015년 2월, 착공에 들어간 후에도 땅속에서 오랜 유물이 발견되는 등 예상치 못한 변수로 공사가 중단되는 악수도 생겼다. 2017년으로 예정됐던 박물관 개관은 2020년까지 연기되어야 했고, 박물관 개장을 앞두고 코로나19가 전세계로 확산되며 오픈은 또 한번 미뤄졌다.

그렇게 박물관 사업이 더디게 진행되는 사이, 아카데미 시상식은 #OscarsoWhite 논란에 봉착했고 할리우드에서는 #MeToo 운동과 함께 페미니즘이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으며, 미국 사회에선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뜨겁게 번져나갔다.

박물관은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고착화할 수 있는 동시에 권위를 전복시킬 수 있는 장소다. 그것이 순수미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공예품을 전시 공간에 품게 된 현대 박물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영화의 중요한 요소들을 보여줄 것”이라고 공표했던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위원회는 다양성의 시대에 그들이 무엇을 전시해야 하는지 다시 판단해야 했다. 박물관 이사회는 17개 지부의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포괄 자문 위원회(Inclusion Advisory Committee)를 확장해 박물관의 다양한 예술가의 작품을 누락하지 않도록 의견을 듣기 시작했다. 재클린 스튜어트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최고 예술 프로그램 책임자는 올해 4월 오스카 최초의 비영어권 배우 수상자인 소피아 로렌, 지금까지 유일한 아메리카 원주민 오스카 수상자인 버피 세인트 마리, 오스카 최초의 청각장애인 수상자 말리 매틀린, 그리고 우피 골드버그와 함께 “오스카 천장을 부수다”라는 타이틀로 온라인 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박물관의 핵심 전시에 해당하는 ‘영화의 이야기’(Stories of Cinema)는 다양한 영화의 역사를 보여준다. 전시가 시작되는 길목에 있는 13분 길이의 영화사 소개 프레젠테이션 영상은 흑인, 아시안,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을 보여주려고 안배한 점이 눈에 띈다. ‘위대한 영화와 영화인들’(Significant Movies and Moviemakers) 갤러리가 선정한 작품 및 인물은 <시민 케인>과 <리얼 위민 해브 커브>, 동양의 이소룡, 여성 편집자 셀마 스쿤메이커, 러시아 피가 섞여 있는 멕시코 출신 촬영감독 엠마누엘 ‘치보’ 루베즈키, 흑인 최초로 장편영화를 제작해 40여편의 영화를 만든 오스카 미쇼다. 오스카 미쇼를 “오손 웰스만큼 영화산업 초기 수십년 동안 혁신가”로 소개하고, 멕시코 이민 가정의 어려움을 다룬 <리얼 위민 해브 커브>는 2012년 작고한 배우 루페 온티베로스의 출연작이다(AMPAS는 매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갖는 추모식에서 그의 이름을 누락시켜 라틴계의 공분을 산 적이 있다). 박물관 로비는 흑인 최초로 (시민권법이 제정되기도 이전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시드니 포이티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흥미로운 것은, 박물관이 그저 인종과 성별을 고르게 할당하는 것으로 정치적 공정함을 확보하고 할리우드 스스로가 진취적이라 자부하는 제스처 이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박물관은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는 것 역시 영화의 역사임을 전시 곳곳에 증명한다. 빌 크레이머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디렉터 및 대표이사는 “우리는 영화사에 있어 정직하고 투명해야 한다. 영화가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매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바를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논란까지도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분장의 역사를 총망라한 전시는 블랙페이스와 옐로페이스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고, 1965년 <라오 박사의 7가지 얼굴>의 분장상 수상 역시 인종차별의 역사를 꼬집기 위한 맥락에서 제시된다. <오즈의 마법사>에 헌정된 갤러리는 루이스 메이어가 주디 갈런드를 학대한 사실을 분명히 명시하며 기념비적인 마스터 피스의 명암을 모두 비춘다. ‘백드롭: 보이지 않는 예술(Backdrop: An Invisible Art) 섹션은 개관 전시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선정했다. 러시모어산 배경을 구현한 설치미술과 로버트 F. 보일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영상 인터뷰를 통해 필름메이킹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편, 당시 촬영으로 인해 원주민들이 받아야 했던 피해를 지우지 않는다. <선라이즈>(1927)의 촬영상부터 시작해 오스카 트로피들이 전시된 갤러리에는 의도적인 공석이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수상자가 된 해티 맥대니얼의 트로피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파괴했다는 루머를 포함해 트로피가 사라진 이유에 대한 여러 소문이 있다.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은 트로피의 도난마저 전시의 일부로 끌어옴으로써 관객 각자의 해석을 기다린다.

위기를 기회로

그런데 이곳이 극장산업이 쇠퇴하고 궁극적으로는 시네마의 위기를 논하는 시기에 문을 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천석 규모의 데이비드 게펀 상영관, 288석 규모의 테드맨 극장은 매일 새로운 상영 프로그램을 예고했지만 팬데믹 상황에서 과연 관객이 충분히 찰 수 있을까?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이 생각하는 그들의 역사는 3층 라이카 갤러리 ‘영화로 가는 길: 리처드 발저 컬렉션 하이라이트’(Path to Cinema: Highlights from the Richard Balzer Collection)에 서 보다 선명해지는데, 옵티컬 토이와 핍쇼, 그림자 연극, 시네마토그래프, 프락시노스코프(조에트로프를 발전시켜 발명한 영사 기구)를 포함한다. 프리 시네마 내지 초기 영화를 조명한 전시는 수업 시간에나 볼 법한 영화사 이론을 늘어놓는 따분한 큐레이션이 아니다. 매직 랜턴과 박물관 2층 ‘넷플릭스 라운지’의 공존은 2시간 남짓의 극장영화가 아카데미의 생존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설상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영화’의 포맷은 수백년 뒤 박물관에서나 만나는 골동품으로 전락한다고 해도, 아카데미 ‘활동사진’ 박물관은 동시대 문화를 선도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영화는 전세계 모든 이가 즐기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수준의 박물관을 가질 가치가 있다.”(빌 크레이머 디렉터 겸 대표이사) 역사가 짧은 미국에는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같은 곳이 없다. 대신 그들은 지난 126년간 가장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은 예술을 통해 총 4억8400만달러를 투입해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고자 하는 박물관을 만들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사진제공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Joshua White)

브루스 더 샤크’는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의 사진 명소가 될 것이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죠스>의 상어 모형이 박물관 어느 층에서나 보이는 곳에 설치됐다. 브루스는 원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전시되었다가 캘리포니아 선 밸리의 고물 집적소에 옮겨졌고, 2016년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을 위해 기증됐다.

사진제공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Joshua White)

1970년대 MGM 스튜디오가 해체되면서 소품과 의상을 경매에 부치게 됐을 때 데비 레이놀즈는 스튜디오를 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의 사비로 수천달러씩투자해 할리우드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의 루비 슬리퍼는 그의 대표적인 소장품이었다. 박물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데비 레이놀즈 보존 스튜디오가 있다.

사진제공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Joshua White)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마거릿 헤릭 도서관과 아카데미 필름 아카이브의오랜 보존 활동에 빚지고 있다. 마거릿 헤릭 도서관에는 1800여개의 특별 컬렉션, 1300만여장의 사진, 6만7천여장의 포스터와 13만7천여점의 프로덕션 아트, 3만7500여권의단행본 등이 있다. 아카데미 필름 아카이브는 오스카 수상작과 후보작을 포함한 25만여편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35mm 및 70mm 필름 프린트를 보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저장소 중 하나다. 지금까지 1천여편의 영화를 복원했다. 사진 속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데일리 프로덕션 리포트와 그레타 가르보에게 보낸 팬레터가 보인다.

사진제공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Joshua White)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에서 관객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을 곳은 2층의 ‘오스카 체험관’이다. 관람객이 돌비극장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것 같은 경험을 체험하게 해준 후 해당 영상을 이메일로 보내준다. 15달러의 별도 티켓 구매가 필요하다.

사진제공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Joshua White)

박물관 4층에서는 북미 최초로 진행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회고전을 만날 수 있다. <이웃집 토토로>의 메이를 따라 트리 터널을 지나 내부에 들어서면 오리지널이미지 보드, 캐릭터 디자인, 스토리보드, 레이아웃, 백그라운드, 포스터 등 40여점의 전시품을 만날 수 있다. 스카이 뷰 설치 전시는 박물관에서 잠시 사색을 즐길 수 있는 명소. 3D애니메이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크릴 페인트나 수채화의 매력은 물론 환경친화적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관이 전시 곳곳에 반영돼 있다.

사진제공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Joshua White)

‘백드롭: 보이지 않는 예술’(Backdrop: An Invisible Art)은 박물관 2층 규모로 진행되는 설치 전시를 보여준다. 개관과 함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러시모어산 페인팅을 재현했다.

사진제공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Joshua White)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양서류 인간과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의 T-800 머리가 전시되어 있다.

SHUTTERSTOCK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의 부의장으로서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한국 영화산업 발전을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서,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이 보여주는 진정한 국제적인 시각이 자랑스럽다”고 발언했다.

백화점 건물이 박물관으로?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디자인하고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 렌초 피아노가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을 디자인했다. 1939년 건축된 스트림라인 모던 양식의 랜드마크인 메이 컴퍼니 백화점 건물을 개조하고, 유리와 콘크리트를 사용해 새로 구축한 거대한 구형 스피어 빌딩을 세운 후 유리 다리로 연결했다. 건축물의 총규모는 30만제곱피트(2만7871㎡). 공교롭게도 박물관 개관일 개막 상영은 메이 컴퍼니 백화점과 같은 해에 제작된 <오즈의 마법사> 오케스트라 상영으로 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