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상황에서 박물관을 열었다. 준비 과정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원래는 지난해에 박물관을 개관하기로 했던 걸로 안다.
그걸 다 얘기하려면 20시간 정도 걸릴 텐데 다들 시간이 되나? (좌중 폭소) 2011년에 박물관 구상을 시작해서 개관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사적으로 자금을 지원받은 프로젝트가 완전히 실현되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미국에는 영화 박물관, 오로지 영화 만들기에 전념하는 박물관이 없다. 그래서 많은 실험과 반복, 대화가 필요했고, 그 결과 이 놀라운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루비 슬리퍼를 보고 원주인이었던 데비 레이놀즈가 생각났다. 그는 생전 이런 곳이 만들어지기를 얼마나 바랐을까!
데비 레이놀즈의 놀라운 보존 작업을 기리기 위해 ‘데비 레이놀즈 보존 스튜디오’라고 명명한 곳을 만들었다. 그는 누구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때 영화 기념품, 소품, 의상, 포스터를 수집했다. 많은 부분에서 선구자였다. 사람들은 영화의 역사를 보존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데비 레이놀즈의 아들 토드 피셔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토드는 여러분이 박물관 투어를 하며 ‘시민 케인 갤러리’에서 봤을 렌즈를 포함한 그들 가족의 컬렉션을 박물관에 빌려줬다. 데비 레이놀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유산의 일부다.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의 의장은 넷플릭스 CEO 테드 서랜도스가 맡았다.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는 곳의 이름도 ‘넷플릭스 라운지’ 아닌가. 아카데미가 생각하는 영화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인가.
우리는 분명 극장 경험에 깊이 전념하고 있고, 이곳에도 최신식 예술 극장을 지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가 오늘날 영화 감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도 안다. 내가 생각하기에 팬데믹 시대가 준 희망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이전에 보지 못했던 영화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공존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형식과 크기의 영화를 추구한다.
이곳을 만들기까지 돌파구가 된 순간이 있었나.
나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일했고, 박물관이 공사에 들어간 후 동부 지역으로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떠났다. 2019년 10월 박물관에 다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아카데미의 모든 지부의 전담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카데미 회원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17개 지부의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에피 브라운이 이끄는 포괄 자문 위원회(Inclusion Advisory Committee)도 확장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의 복잡한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영화를 축복하는 데만 전념하는 박물관이 될 수는 없었다. 우리는 훨씬 덜 자랑스러운 순간들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에겐 그러한 문제를 탐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 둘러보니 유럽영화, 특히 프랑스영화의 비중이 낮은 것 같다.
전시는 계속 바뀐다. ‘스토리 오브 시네마’는 계속 다른 스토리를 보여주게끔 구성되어 있다. 1년 안에 우리는 어느 저명한 프랑스 감독에게 바치는 갤러리를 열 것이다. 지금도 이 박물관에는 프랑스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뤼미에르 형제는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스파이크 리 갤러리’에 가면 그가 프랑스 뉴웨이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는 국제적인 영화 박물관이다. 전세계 영화에 대해 모두 이야기할 것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무엇을 얻어가길 바라나.
위대한 발견의 순간을 원한다. 사람들이 그들이 원래 알고 사랑하는 영화와 영화 예술가를 만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이 공예라든지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 복잡한 역사도 배우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