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구경이>는 배우 조현철에게 오랜 기간 익숙한 작품이었다. “성초이 작가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라 몇년 전부터 열심히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네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라며 오경수를 소개했다. 대구 출신에 맨박스의 틀을 깨고 나오는 캐릭터라고, 드라마 <마인드헌터>의 FBI 요원 홀든처럼 연기하면 된다고 했다. 홀든 이야기가 미끼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웃음)” 조현철이 연기한 오경수는 NT생명 조사B팀에 속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여기며 나제희 팀장(곽선영)을 무시하고 B팀에서 실적을 쌓아 A팀으로 이적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구경이(이영애), 산타(백성철)와 함께 팀을 꾸린 뒤로 B팀에 잔류하기로 결심한다. “초반에는 아직 맨박스에 갇힌 설정이라 여성인 나제희와 구경이에게 경계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틀이 깨지며 오히려 두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그런 변화 과정이 잘 드러난 재밌는 캐릭터였다.” 조현철은 작품에 관해 성초이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며 신을 만들어갔다, “캐릭터에 관해 질문하면 레퍼런스를 많이 던져줬다. 주로 인터넷 밈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가령 경수가 나제희 팀장을 쫓아가는 장면은 <포켓몬스터>의 모다피처럼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대로 내가 살을 붙여 연기한 뒤 ‘이렇게 했는데 괜찮냐’고 뒤늦게 물어보기도 했다. 깡패 분장을 하고 야쿠자처럼 행동하는 신이 특히 그랬다.”
조현철의 연기는 익숙한 듯 새롭다.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최양주와 같이 독특한 개발자 역을 맛깔나게 표현하는 한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최동수 대리, <아르곤>의 허종태 기자처럼 현실에 발붙인 인물은 물 흐르듯 그려낸다. 최근 <D.P.>에선 조석봉의 평온함이 격렬한 에너지로 뒤바뀌는 과정을 선명하게 묘사했고, 곧이어 방영된 <구경이>에선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서포트하는 경수로 스크린에 등장했다. 2021년은 과연 조현철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배우인지 새삼 그 가능성을 실감한 해였다. 자신만의 캐릭터 접근법이 있는지 묻자 “크게 무리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 평소 말하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게 제일 좋은 연기라고 생각한다. 정확한 딕션을 하고 익숙한 호흡으로 대사를 이어가는 건 일부러 하지 않으려고 했다.” 촬영 중 변수가 많다보니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기보다는 현장에서 다양하게 시도하는 것을 선호한다. 촬영 시 “방대한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낸다”는 이정흠 감독 코멘트와도 이어지는 대목이다.
<구경이>와 <D.P.>로 연기자로서의 지평을 넓힌 조현철은 내년에 감독으로서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그의 신작 <너와 나>는 <로보트: 리바이벌> 이후 약 6년 만의 연출작이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 두 친구가 싸우는데 한명은 수학여행을 가고 한명은 남는다. 그 하루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를 연출하며 조현철은 실존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비어 있는 학교가 다시 아이들로 채워지고 그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연출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잃은 아이들을 다시 살리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꽉 차더라. 마찬가지로 내가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면, 비록 시나리오를 재현하는 것일지라도 그의 대사와 행동을 하는 과정이 다르게 와닿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 즈음에는 애니메이션 <둘리>의 실사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조현철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행보는 앞으로도 예측 불가할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그의 다음 장이 더욱 궁금해진다.
<구경이> 이정흠 감독이 말하는 배우 조현철
“조현철 배우는 <구경이>에 출연한 배우 중 가장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인간 조현철은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다섯 마디 이상 대화하기 힘들 때도 있는데, 배우 조현철은 디렉팅을 주면 백 마디 이상 이야기를 나눈 사람처럼 연기한다. 촬영 초반에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디렉팅을 하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는데,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연기를 해서 그 후로 의심을 지워버렸다. 배우 조현철은 믿음이다.”
영화
2020 <이웃사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2019 <말모이> <판소리 복서> <국경의 왕> <영화로운 나날>
2017 <초행>
2016 <마스터> <터널>
2015 <차이나타운> <라오스>
2014 <알레르기>
2013 <9월이 지나면> <이름들>
2012 <건축학개론> <영아> <남양주는 모른다> <리타르단도>
2011 <11月>
2010 <두근두근 영춘권>
2009 <잠복기>
드라마
2021 <구경이> <D.P.>
2019 <호텔 델루나>
2018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2017 <아르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