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박정자는 캐릭터의 서사를 통해 곧 세계관의 논리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다른 딸과 아들을 홀로 키우는 그는 자신의 생일 5일 후 지옥에 가게 된다는 고지를 받는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 아니냐며 평범한 사람을 매도하고 신상까지 터는 범사회적 광기, 신흥 종교 새진리회가 박정자의 죽음을 생중계하면서 벌어지는 내러티브 반전 모두가 그를 경유해 묘사된다. <지옥>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 캐릭터는 “분석과 직관”을 중요시하는 배우 김신록에 의해 살뜰히 완성됐다. “모든 캐릭터를 연기할 때 분석과 직관이 잘 어우러지도록 연기하고 싶다. 분석의 영역도 모두 직관으로 넘어가서 수행되거나 그렇게 보일 수 있기를 바랐다. 박정자는 세계관의 로직이 성립된 이후 <지옥> 2부에서 펼쳐질 사람들의 반응에 설득력을 줄 수 있는, 극 초반에 압축적으로 셋업을 하는 역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기능 이상의 풍성함을 구현하기 위해 인물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가 잘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인물을 구성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인물은 개별자가 아닌, 그 인물이 만나는 세계의 총합이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상대의 핵심을 먼저 확인한 후 논리가 촘촘하게 짜여진 한편의 글을 쓰듯 캐릭터와 작품, 연기에 대해 답하는 배우의 태도는 그가 살아온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김신록은 연극 매체와 연기를 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 석사 학위만 두개를 딴, 학교를 연기 배움의 터로 여겼던 배우다. 한양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과에서 연극 이론 석사를,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연극원 연기과 전문사에서 연기 실기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재학 당시) 사회대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연기에 재미를 느꼈지만 졸업한 해에 바로 향했던 대학로 무대에서 모든 게 어렵고 낯설기만 했다. 한양대에서 연극 이론, 연극사, 연출, 무대 기술, 연기 등 연극 전반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연극사 책에서 봤던 무수한 연기를 실제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연기 수업만 들을 수 있는 한예종 전문사에 갔다.”
이쯤되면 김신록을 ‘엘리트’, ‘지적인 배우’와 같은 수식어, 다시 말해 이른바 학벌 좋은 배우들에게 손쉽게 붙는 표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김신록의 연기 방법론에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맥락이 있다. 배우 스스로도 언급했듯 세상에는 머리로 연기하는 대신 동물적으로, 계산되지 않은 연기를 해야 한다는 식의 편견이 있다. 실제로 그 역시 연기를 막 시작했을 때 똑같은 말을 들었다. “대학원 실기 석사 논문 서론도 그 부분에 의문을 표하면서 시작했다. 배우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건가? 반감이 있었다. (웃음) 시간이 지나니까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겠고, 동물적이라는 표현에 담긴 장점 그리고 그 이면의 맹점도 알게 됐다.” 그래서 김신록은 “주어진 상황을 추상화해서 올라가면 모두 원형의 감정이나 보편의 이해에 닿을 수 있다”고 대본을 분석하고, 비록 육아의 경험은 없지만 순간순간의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애써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는 원형의 감정을 꺼내면서 <지옥>의 박정자를 하나씩 구체화했다. 이는 순차적인 논리에 의해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영감이라는 건 화살표를 그려가며 순차적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많은 점들이 네트워크처럼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신록은 자신이 <지옥>, 어떤 시청자들에겐 이미 드라마 <괴물>에서 주목하는 배우가 된 것을 두고 “숙제를 빨리 끝내버린 기분”이라고 묘사했다. “배우는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론이 있다. 내겐 그게 우연찮게 학교였던 거고. 어떤 배우든 자기만의 방법론으로 꽃을 피우는 순간이 올 수 있는데, 나는 나만의 연기를 했고 운 좋게 최근 작품들을 성공적으로 봐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아주아주 감사하다. 이제부터는 또 자유롭게 새롭게 해볼 수 있겠다.” 현재 열심히 촬영 중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욕심 많고 애교도 많은 재벌집 고명딸로, 지금까지 매체에서 보여준 캐릭터와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예정이다.
<지옥> 연상호 감독이 말하는 배우 김신록
“철저하고 연구하는 지성으로 계획하여 연기하는 것과 날것의 직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괴물 같은 연기자다. 김신록의 한계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아마도 10년 후에는 한국 연기파 배우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배우가 될 것 같다.”
영화
2021 <접몽>
2018 <버닝>
2005 <연애의 목적>
드라마
2022 <재벌집 막내아들>
2021 <어느날> <지옥> <괴물> <방법>
연극
2021 <아웃오브러브> <접몽>
2020 <피어리스: 더하이스쿨맥베스> <마우스피스>
2019 <비평가> <녹천에는똥이많다>
2018 <비평가> <아홉소녀들>
2017 <워킹헐리데이> <한민족디아스포라전: 영비어천가>
2016 <더파워> <연옥> <겨울이야기>
2015 <토막> <더파워> <이카이노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