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배경에 테이블 하나 덩그러니 놓인 여느 시사 토크쇼 세트장.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에 짬이 나자 검찰 출신 보수야당 의원 차정원(배해선)이 상대 패널에게만 들리도록 배우자 학력 위조 문제를 꼬집는다. “전 진즉에 남편 분리수거했더니 이런 악재 터질 일이 이젠 없네요. 이런 걸 견제구라고, 몸속 깊숙이 찔러만 본 거니까 너무 쫄진 마시고. 내 직접 맞히진 않을게.” 차정원은 상대 패널의 가족 문제를 짚은 뒤 호탕하게 웃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당황한 상대는 녹화가 시작되자 차정원의 페이스에 말리기 시작한다. 차정원은 고수다. 상대방의 공격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기선 제압에 성공하는 정치 9단이다. 법정 싸움을 이기고 오느라 적잖이 세월을 까먹고 어느새 당내에선 비주류가 됐지만 ‘비주류 감성’만은 없다. 이길 수 있다는 배짱 ‘위닝 멘털리티’를 지녔기 때문이다. 배해선은 스스로의 캐릭터를 “자기 힘으로 성장하고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정치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요약했다.
정치 시트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서 많은 시청자를 사로잡은 순간 중 하나는 차정원이 팽길탄 목사(권태원)에게 한방을 먹이는 옥상 신이었다. 팽 목사가 “차 의원은 딱 봐도 야성이 쫙 흐른다”면서 몸을 치근대자 차정원은 악수를 청한 뒤 그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민망해하며 화제를 돌리기보다 “내려가보셔야죠”라고 말하더니 팽길탄만 느끼도록 손아귀 힘을 보여주는데, 이 여자의 배짱이 보통 아니다. 하지만 해당 장면을 찍을 당시 현장 상황이 쉽지 않았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세찬 바람이 불어 그의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슬퍼서가 아닌, 바람 때문에 눈물이 났고, 대사를 하려고 입을 벌리면 먼지부터 들어왔다. 대본을 읽을 때부터 “차정원이 마음에 드는 순간”이자 “제일 기대했던 장면”이었는데 말이다. 배해선은 버티고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환호하는 순간이 탄생했다.
영화와 드라마 이전에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종횡무진한 배해선에게 몸을 컨트롤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몸에 밴 일이었다. “무대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드러나기 때문에 앉으면서 대사하거나 누웠다가 일어날 때도 소리가 덜 바뀌어야 객석에 잘 전달된다”는 게 그의 연기 지론이다. 뮤지컬 세트를 전환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척척이었다. 사실 배해선은 어린 시절부터 몸을 잘 쓰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잠깐 취미로 기계체조를 했고, 남자 친구들이랑 축구도 곧잘 했다. 이후 그의 삶에서 노래와 춤은 뗄 수 없는 존재가 됐고, 2002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신인상을 받은 후 3년 뒤엔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배해선은 도회적이고 강단 있어 보였고, 카메라 앞에만 서면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여성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팝송을 즐겨 듣고 외국어 가사를 잘 따라 불렀던 그의 경험치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반은경 마케팅 부장이 “젠틀하면서 와일드하고 인텔리한데 이노센트, 마일드하면서도 섹시한 그런…”이라고 말하는 순간을 화려하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드라마 <사의 찬미>에서 주인공 윤심덕(신혜선)의 일본인 선생을 연기하면서 일본어 대사를 소화하는 데 도전하기도 했다. 4선 국회의원(<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언론사 국장(<엑시트>), 부검의(<사바하>), 국회의원 후보(<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 ), 앵커(<SF8>) 등 그는 여러 직업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촬영 기간이 달랐으나 그가 출연한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구경이> <해피니스>가 비슷한 시기에 공개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의 등장이 혜성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배해선은 ‘노력파’다. 배우란 “다 경험하지 못한 걸 표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존재”라고 믿는 그는 “어떨 땐 감을 잡기 어려워 포기하고 싶고 스스로가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무수히 자신을 부수고 고뇌한 끝에 탄생한 그의 연기는 하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차정원도 고수지만 배해선, 이 배우 내공도 보통이 아니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윤성호 감독이 말하는 배우 배해선
“배해선 배우는 거의 달인의 경지다. 의자에 한번 앉아도, 누워 있다가 일어나도 그가 하면 뭔가 다르다. 현장에서부터 잘한다고 느꼈는데, 편집하면서 더 감탄했다.”
영화
2021 <정직한 후보2> <해피뉴이어>
2020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결백>
2019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 <엑시트> <로망> <사바하>
2018 <암수살인> <너의 결혼식>
2000 <가위>
드라마
2022 <지금 우리 학교는> <나쁜 기억 지우개> <왜 오수재인가>
2021 <우수무당 가두심> <해피니스> <구경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오! 주인님> <박성실씨의 사차산업혁명>
2020 <앨리스> <트웬티 트웬티> <출사표> <사이코지만 괜찮아> <하이바이, 마마!>
2019 <호텔 델루나>
2018 <사의 찬미> <이리와 안아줘> <EXIT> <신과의 약속>
뮤지컬과 연극
2020 <더 드레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2019 <오이디푸스>
2018 <브로드웨이 42번가>
2017 <틱틱붐> <모차르트> <마스터클래스>
2016 <로미오와 줄리엣> <두 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