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에게 따라붙는 ‘변신’이란 표현이 김성오에게만큼은 다르게 쓰인다. 단역 시절부터 악역을 많이 맡아온 그에게는 <킹메이커>의 박 비서처럼 도드라지는 갈등이 없는 캐릭터가 진짜 ‘변신’이다. 박 비서는 야당 대선 후보 김운범(설경구)의 손발이 되어 돕는 인물이다. “대의를 위해서 김운범의 뒤와 옆에서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보좌”하는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나의 PS 파트너>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으로 이미 두번 호흡을 맞춘 변성현 감독이 “선배, 센 연기는 많이 해봤잖아. 그런 건 다른 데 가서 해”라고 말하며 박 비서 역을 제안했을 때 김성오는 그래서 고맙고 기뻤다고 한다.
- 변성현 감독과 오래 작업해왔는데, <킹메이커> 대본은 어떻게 읽었나.
= 그동안 정치에 딱히 관심을 두고 살지 않았는데 대본에 그려진 정치 세계가 오밀조밀하고 재밌게 다가왔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정치 일선에서도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 김운범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창대(이선균)는 엄창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박 비서에게도 모티프가 된 실존 인물이 있나.
= 박 비서는 창조된 캐릭터다. 선거 캠프에는 대선 주자를 돕는 사람이 여럿 있잖나. 그동안 뉴스를 볼 때 전면에 나서는 대선 후보나 국회의원만 보고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나만 모를 뿐이지 다들 정치적으로 ‘한 가닥’하는, 엄청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 이전까지 센 캐릭터나 코믹한 캐릭터를 맛깔나게 살리는 연기에 도전해왔는데, 박 비서는 생활 연기쪽이다.
= 영화계에서 단역으로 출발했고, 짧은 시간에 내 존재를 알리고 싶은 욕망을 품은 채 배우로 자라왔다. 그러다보니 대사 한마디도 일반적이지 않게 표현하기 위해 열심히 분석하고 머리를 굴려 역할을 만들어갔다. 배우가 되기 위해 뭐라도 보여줘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작은 배역도 내겐 엄청난 미래를 바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다보니 줄곧 도드라지는 역할을 많이 했고 악역을 자주 맡았다. 박 비서는 내가 여태까지 해보지 못한 역할이라 정말 재밌었다. 과거 정치인의 사진들을 찾아보니 늘 정치인 주변에 6~8명이 함께 서 있었고, 변성현 감독에게 내가 본 사진처럼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포커스가 나간 채 카메라에 잡혀도 되고 내 얼굴이 프레임에 살짝 걸려도 되니까 김운범 주변에 항상 있었으면 좋겠다고. 관객이 박 비서를 인지하지 못해도 좋다.
- 이제는 배우로서 알려졌기 때문에 자유로워졌나.
= 지금은 다른 일과 병행하지 않고 연기로만 먹고살 수 있고, 누가 물으면 배우가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됐다. 이젠 다시 원론으로 돌아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란 여러 형태의 삶을 살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하는데, 내겐 연출자와 관객이 생각하는 배우 김성오의 이미지가 있다. 변성현 감독이 아닌 다른 연출자였다면 박 비서와 같은 캐릭터를 내게 제안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변성현 감독이 “선배, 센 연기는 많이 해봤잖아. 그런 건 다른 데 가서 해”라면서 박 비서를 제안했을 때 그래서 정말 고맙고 기뻤다. 박 비서 캐릭터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고 싶다고 의견을 전하면서 역할을 만들어갔고 변 감독도 “선배 생각대로 하자”고 믿어줬다.
- 박 비서는 김운범이 일정을 소화하고 한밤중에 사무실로 돌아와서 바쁘게 다시 회의를 하는 장면에서부터 늘 김운범과 함께한다. 대체 박 비서가 어떤 정무적인 능력을 지녔기에 계속 김운범의 지근거리에 있을까 궁금해질 즈음 서창대와 다른 자신만의 판단력을 드러낸다.
= 어찌됐건 서창대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방법으로 정치판에 다가온 인물이다. 박 비서는 ‘서창대 네가 정치 해봤어? 나 정치 이만큼 했어’라는 식으로 그와 각을 세운다. 갑자기 나타난 서창대가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니까 그건 정치가 아니라고, 김운범이 가고자 하는 정치가 아니라고 보여주는 거다. 어느 때부턴가 서창대의 방식이 정치판에서 통하자 박 비서도 서창대의 방식이 맞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끝내 그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 그런 박 비서가 왜 정치판에 들어왔을 것 같나.
= 대통령까지 꿈꾸는 마음으로 박 비서를 연기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정치계에 입문했다는 느낌으로. 현장에서 (전)배수 형한테 “난 엘리트라고. 형은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라고 농담을 던진 적도 있다. (웃음)
- <불한당>에 이어 <킹메이커>에서도 ‘도롱이’라는 아이를 가진 아빠로 그려진다. 짧은 대사로 암시되는데 <불한당> 팬들이라면 좋아할 것 같다(참고로 ‘도롱이’는 김성오의 아들 김아일의 태명이다.-편집자).
= <불한당> 첫신을 빼면 목적의식이 담긴 대사가 많지 않아 감독님에게 “우리 도롱이 얘기라도 한번 해야겠다”라고 말해서 ‘도롱이 대사’가 탄생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불한당> 팬들이 좋아해주고 내게 ‘도롱이 아빠’란 별명을 붙여줬다. <킹메이커> 때는 변성현 감독이 도롱이 이야기를 대사에 녹여줬다. 변성현 감독의 이전 작품을 보지 않고 <킹메이커>만 보면 단순한 대사로 느껴지겠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는 재미와 의미가 생겼다. 변성현 감독도 그런 재미를 좋아한다. 영화감독 입장에서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해치는 대사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맥락을 아는 관객에게는 재미 요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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