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킹메이커' 설경구, 사실적 연기의 왕
2021-12-22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킹메이커>에서 설경구는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는 연단의 한가운데에 서서 모두의 시선을 흡수하는 정치인 김운범을 연기한다. 그는 킹이고 빛이다. 영화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정치인 김운범과 김운범의 곁에서 선거 전략을 짜는 서창대(이선균)의 관계에 집중하는데, 설경구는 환하고 거대한 존재가 되어 서창대의 그림자를 진하게 부각시킨다. 알려졌다시피 김운범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며, 영화는 김대중 대통령이 1970년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까지의 시기를 주요하게 다룬다. <자산어보>의 정약전으로 꼿꼿하면서도 호기심 많은 선비의 얼굴을 보여주며 흑백의 화면에 조명을 밝혔던 설경구는 <킹메이커>에서도 실존 인물과 영화적 캐릭터 사이에서 완벽한 줄타기를 하며 관객을 감탄하게 만든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에 이어 변성현 감독과 또다시 만난 설경구와 <킹메이커> 이야기를 나눴다.

- <자산어보>가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었기에 시나리오도 읽기 전에 출연을 약속했던 것처럼 <킹메이커>를 결정하는 데에도 <불한당>을 함께한 변성현 감독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을 듯하다.

= 처음 <불한당>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킹메이커> 시나리오도 같이 받았다. 그땐 <불한당>을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킹메이커>냐고 하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시나리오에는 캐릭터의 이름이 실존 인물의 이름 그대로였고, 솔직히 너무 부담스러워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변성현 감독은 내가 그 역을 맡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여지를 준 건가.

= 여지를 준다고 준 게, 나는 김운범이 아니라 서창대를 하겠다고 했다. 물론 서창대가 분량도 많고 어려운 캐릭터지만 (역사적으로) 감춰진 인물이니까 표현이 자유로울 것 같았다. 그런데 김운범은 너무나 알려진 인물이라 압박감이 심했다. 그래서 계속 김운범에 어울릴 만한 다른 배우를 매칭시켰다. 이 배우가 김운범 하고 내가 서창대 하면 되겠네 하면서. 그러면 변성현 감독은 완강하게 “안돼요!” 하고. 그래서 절충한 게 이름을 바꾸는 거였다. 그분의 실명을 쓰지 않는 것. 이름을 바꾸고 나니 심리적으로 조금 괜찮아지더라. 이름 석자가 뭐라고. 그제야 조금 내 걸 섞어서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사를 안 해도 되니까.

- 김운범은 어떤 인물이라고 해석했나.

= 진솔하고 진실된 사람. 서창대와 부딪힌 이유도 목적을 위한 과정과 수단에 대한 생각 차이 때문이다. 김운범은 목적이 조금 어그러지더라도 수단과 과정을 올바르게 지키고 싶어 하는, 그릇이 큰 사람이다. 또 이상만 좇는 게 아니라 실용적이고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연설 장면 외에는 편한 모습으로 가려 했다.

-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의 모습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할지 혹은 얼마나 새롭게 창조할지, 그 사이에서 줄타기가 쉽지 않았겠다.

= 배우는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고 창조를 향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못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실존 인물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도 없고 호남 사투리 같은 특징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모사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시대를 동시에 살았던 분이라 내 눈으로 직접 봤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 그걸 떨쳐버리기는 힘들었다. 그러니까 계속 줄타기를 하는 거다. 선거 연설 장면을 준비할 때부터 힘들었다. 제작진이 그분의 비서관 출신 국회의원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연설 장면을 도와주겠다 했는데 내가 노(No)했다. 누군가에게 배우기 시작하면 틀에 갇혀 자유롭지 못할 것 같더라. 지금은 답이 없지만 어떻게든 답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 어떤 식으로 답을 찾아나갔나.

= 톤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혼자 집에서 소리 지르며 연설 연습을 할 수도 없고. 장충공원 체육관에서의 연설 장면은 세트에 블루매트 치고 100만 관중이 있다상상하며 혼자 찍었다. 난감하긴 했다. 연설은 라이브여야 하는데. 감정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서 사람들을 설득해 표를 얻는 게 연설의 목표이기 때문에 연설은 선동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선동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관중의 호흡을 받아먹는 게 연설이다. 100만 지지자들이 앞에 있으면 초인적인 힘이 나올 것이고 엔도르핀 쫘악 돌고 머리가 쭈뼛쭈뼛 서지 않을까? 그렇게 최대한 실제 상황을 상상해봤다.

- 김운범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장면 속 대사도 다 외워서 연기했다고. 소리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잠깐 등장하는 장면이라 요령을 부려 찍을 수도 있는 장면이었는데.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 4절을 반복해도 상관없었다. 빨리 감아 보여준다는 것도 알았고.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티가 나든 안 나든 외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변성현 감독은 사전에 특별히 요구한 게 있었나.

= 변성현 감독은 폼! 스타일! 무조건 멋있어야 된다고 했다. 절대 화면에 두턱(이중턱)이 나오면 안된다. 처음엔 막연하게 꼭 턱선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 생각해서 살을 안 빼고 있었는데 내가 안일했다. (웃음)

- 서창대는 김운범에게 “나는 당신과 끝까지 함께하고 싶습니다” 하고 구애한다. <불한당>이 누아르 장르를 빌린 멜로였듯 <킹메이커>도 정치 드라마의 외피를 두른 멜로 느낌이 났다.

= 우리도 촬영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것도 사랑 이야기일 수 있겠다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한쪽이 계속해서 구애하고, 그러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어느 순간 서로의 생각 차를 확인하는.

- 개봉 대기 중인 차기작이 많다.

= <야차>는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고, 이해영 감독의 <유령>,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은 찍었고, 김용화 감독의 <더문>은 촬영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곧 변성현 감독, 전도연 배우랑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촬영에 들어간다. <길복순>은 액션인데 멜로다. 요즘은 무조건 멜로라 말한다.

- 너무 멜로를 독점하는 것 아닌지.

= <자산어보>도 멜로다. 이정은씨와의 멜로도 있었고. (웃음)

스타일리스트 이태희·헤어 김수철·메이크업 정슬기

의상협찬 해리슨테일러, 스플렌디노, 베네시, 수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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