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 현장에는 ‘전배수 복덕방’이 있었다. 종종 현장에서 대기 시간이 길어질 때 배우들은 그가 따로 마련한 ‘전배수 복덕방’에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나중에는 가장 선배 배우였던 박인환까지 “여기가 전배수 복덕방인가?”하며 자리를 찾을 정도였다. “배우보다는 FD의 마음으로 현장에 나갔다”는 그는 카메라 밖에서나 안에서나 분위기 메이커였다. 전배수가 연기하는 이 보좌관은 정치인 김운범(설경구)이나 그의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에 비해 드라마틱한 감정 변화를 요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지만 프레임 안에서 매컷 다양한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전배수의 모습을 두고 현장에서는 “이번에는 전배수가 무엇을 할까”라며 일종의 게임까지 만들어졌다. 서창대가 등장하기 전 선거 사무실은 오합지졸에 가깝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격식을 차리기보다 “동네 이장보다는 조금 유능한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집중했고, 그외의 시간엔 동료들이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현장의 윤활유 역할을 자처했다.
예정된 차기작만 6편에 이른다는 전배수가 욕심을 버리고 힘을 뺀 태도로 작품에 임하게 된 데에는 사실 극단 ‘학전’ 시절부터 함께 연기했던 설경구의 영향이 컸다. 그의 첫 영화 <사랑을 놓치다>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이미 극단 시절부터 스타였던 설경구를 수년 만에 다시 마주쳤던 날을 전배수는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4번째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였다. 너무 반가워서 아는 척했더니 내가 당시 했던 폭탄 머리를 보고는 ‘얘는 머리가 왜 이래~’ 하고 그냥 올라가는 거다. 너무 속이 상했다. 스타가 됐다고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느냐며 집에 가는 길에 계속 욕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경구씨가 그날 바로 ‘배수가 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너무 고마웠다.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계속 놓치다가 영화 촬영이 끝날 때쯤 ‘형 고맙습니다. 형을 안 만났으면 내가 어떻게 영화를 해’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딱 이렇게 반응하더라고. ‘뭐가, 임마. 그냥 이 영화가 너 거였으니까 하는 거야.’” 같은 극단에 있었던 황정민, 김윤석, 장현성 등이 연달아 스타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특정 영화를 통해 자신 역시 비상할 수 있지 않을까 꿈꾸던 전배수에게 설경구의 말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작품은 배우가 잘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작품을 할 운명이었기에 만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기대감 때문에 내가 너무 들뜨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때마다 형이 했던 그 말을 떠올린다.”
또한 메소드 연기를 지나치게 신봉했던 과거와 연극 연출을 병행했던 경험은 그의 연기관을 다시 정립하게 해줬다. 전배수가 이정은, 이문식, 안내상 등과 함께 연극하던 시절, 러시아 유학파들이 한국에 돌아오면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메소드 연기가 화제가 됐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대에서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서로 네 연기는 가짜라고 싸우기만 하다가 사람이 바닥까지 갔다. 먹고살아야 하니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더니 마지막까지 남은 건 이정은 누나랑 나밖에 없었다. (웃음)” 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섰을 때 그는 배우가 무대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메소드 연기는 그냥 연기를 좀더 효과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라이어> 등의 연극 연출 경험은 현장 분위기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천 가지 지식이 있어도 한 가지 깨달음이 없으면 안된다. 내가 아무리 논문을 쓸 정도로 작품을 해석한다고 해서 꼭 좋은 작품이 나오지는 않는다. 결국 무대에 있는 배우가 어떤 기분으로 분장실을 나와서 연기를 하는지, 그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정말 힘들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역할일 뿐인데 배우들끼리 마음이 닫혀 있다면 어떻게 대사를 주고받겠는가. 코앞에 있는 사람조차 감동시키지 못하면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것은 위선이다.” <킹메이커>는 배경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극 전체의 텐션을 팽팽하게 유지시키는 데 얼마나 긴요한 역할을 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 근간에는 전배수가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경험에서 얻은, 연기뿐만 아니라 누구나의 인생에도 적용될 근사한 지혜가 담겨 있다.
스타일리스트 임지혜·헤어 박도희·메이크업 이남희·의상협찬 슈트(shu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