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이전의 스파이더맨과 달리 살면서 그리 고통을 겪을 일이 없었다. 우선 가족이나 친구를 잃어본 적이 없다. 그가 처음 느낀 허전함이란 아이언맨의 빈자리인데 이는 사실 전 지구적인 재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피터 파커는 자신의 내밀한 고통과 마주한 적이 없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피터가 인생 최대 위기를 맞게 되면서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이야기다. 톰 홀랜드가 “스파이더맨이 가진 최고의 슈퍼파워는 피터 파커 자신의 겸손함”이란 말을 한 적 있는데 스파이더맨을 둘러싼 모든 사건, 사고의 시작과 끝이 그의 친절한 이타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과연 그의 선의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피터 파커가 고통을 이겨내는 법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마블 코믹스와 <스파이더맨> 영화화 시리즈에 매번 등장하는 이 대사는 친절하고 다정하고 이타적인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1960년대에 작가 스탠 리에 의해 만들어진 10대 슈퍼히어로 피터 파커는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작가와 감독에 의해 이야기와 캐릭터가 덧입혀졌지만 그가 쫄쫄이 슈트 아래 숨기고 사는 이 무거운 ‘책임감’ 덕분에 지금껏 사랑받을 수 있었다. 메시아도 자경단원도 아닌, 우리의 친절한 이웃으로서 말이다. 2000년대 이후 슈퍼히어로영화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이후 계속해서 영화화된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샘 레이미 감독과 토비 맥과이어, 마크 웨브 감독과 앤드류 가필드에 이어 존 와츠 감독과 톰 홀랜드 콤비로 부활했다. 돈을 벌기 위해 팍팍한 일상을 보내야 했던 고된 토비 맥과이어식 스파이더맨도, 언제나 환한 웃음과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로맨틱한 연애를 즐기던 앤드류 가필드식 스파이더맨도, 수다스럽고 덤벙거리는 톰 홀랜드식 스파이더맨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고유의 친근한 매력을 공유했다. 피터 파커는 언제나 우리의 친절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이웃이었다. 마블 스튜디오가 MCU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선의와 책임감을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인생 동력으로 삼는 스파이더맨의 캐릭터에 천방지축 틴에이저라는 개성을 불어넣은 것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존 와츠 감독과 에이미 파스칼 프로듀서, 케빈 파이기 마블 스튜디오 대표가 MCU의 스파이더맨 단독 주연 3부작을 만들면서 주력한, 하이스쿨 무비와 슈퍼히어로영화의 장르적 결합에 부침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피터 파커의 멘토였던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부터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슈트를 입기 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더더욱 슈트를 입지 말아야 한다”는 꾸지람을 들어가며 벌였던 피터의 오지랖 섞인 실수들이 그를 어리숙한 캐릭터로 보이게 했다. 2편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 그를 못살게 굴고 기어이 가짜 뉴스까지 유포해가며 실명을 세상에 공개해버린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런홀)도 실은 피터보다는 고용주였던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토니 스타크에게 반감을 가진 캐릭터였다. 너무 어리고 착하다 보니 누구에게 복수심조차 유발시키지 못하는, 아이언맨의 영향 아래에서 홀로서기가 어려워 보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블 스튜디오가 3부작의 마지막 편을 앞두고 해결해야 했던 숙제는 ‘어벤져스’의 뉴욕 사태를 직접 몸으로 겪으며 맨해튼 외곽에서 자란 고등학생 피터 파커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팬들에게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톰 홀랜드는 그래서 이번 영화에 대해 “피터가 성장하는 것, 그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 그리고 그가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것, 그렇게 완전한 ‘어벤져스’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멀티버스라는 새로운 위기
그런데 이번엔 너무나 큰 위기에 봉착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아이언맨의 말을 안 듣고 기어이 우주까지 따라 올라갔다가 5년 동안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돌아온 피터는(<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멘토였던 토니 스타크의 빈자리를 절실하게 느끼며 미스테리오에 대항해야 했다(<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그사이 텐 링즈의 수장 웬우의 만행은 그의 아들인 샹치가 막아냈고(<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우주의 생명 창조자 셀레스티얼들의 리더 아리솀의 거대한 의도 아래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지구는 ‘이터널스’가 막았다(<이터널스>). 지구의 위기는 스파이더맨 외에도 지킬 사람이 아직 있으므로 이번에 피터 파커가 처한 위기가 최악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한 10대 소년 피터의 입장에서 자신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의 일상이 파괴된다는 것은 우주가 무너져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룬 마법의 일환인 ‘망각의 주문’(코프콜의 룬)을 써서 피터를 돕지만 이 역시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자칫 세상 모두가 그를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에겐 주저할 여유가 없다. 톰 홀랜드를 스파이더맨에 캐스팅한 이후 줄곧 “틴에이저 슈퍼히어로가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자 했던 존 와츠 감독이 이번에는 작정하고 피터를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내던진다. 그리하여 피터 앞에 찾아온 멀티버스의 빌런들, 닥터 옥토퍼스(앨프리드 몰리나), 그린 고블린(윌렘 대포), 샌드맨(토머스 헤이든 처치), 일렉트로(제이미 폭스), 리자드(리스 이반스)가 뉴욕을 뒤집어놓는다. 이제 피터 파커는 까칠한 소서러 수프림 닥터 스트레인지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모두 원래 자기들이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래야만 친구들이 제대로 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피터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말이다.
스파이디 어셈블
따라서 역대 스파이더맨의 MCU 입성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작진과 배우들이 최선을 다해 답을 하지 않았을 뿐. <어벤져스>의 뉴욕 전투에 이어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타노스와의 전투 이후 계속해서 관객을 만족시킬 이벤트를 만들어내야 했을 마블 스튜디오로서는 ‘스파이디 어셈블’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이벤트였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준비한 MCU 역사상 가장 거대한 컬래버레이션은 영리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각각의 멀티버스에서 존재하는 스파이더맨이 한데 모인다는 설정 아래 이들은 각자의 세계에 속한 빌런을 다시 한번 물리친다는 행위 이상의 목적을 이룬다. 친절하고 다정한 피터 파커의 성정으로 인해 상대 빌런들을 계도하고 그들이 죽음에 처하지 않도록 ‘두 번째 기회’를 준다. 사실 두 번째 기회란, 피터 파커 그들 자신에게 되레 절실했던 기회다. 멀티버스의 스파이더맨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을 공유한다. 이들은 MCU의 피터 파커의 아픔을 위로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아픔도 치유받게 된다. 그 마지막 순간에는, 복수심에 가득 찬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는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의 선택에 주목한다. 앞선 스파이더맨들과는 차원이 다른 우주의 위기를 막기 위해 그가 내리는 어떤 결정 다음에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20대로서의 여정, 대학 시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선의라는 완벽하고 강력하고 절대 사라질 리 없는 무기를 얻게 된 스파이더맨의 위대한 리셋. 팬데믹 이후 완전히 뒤틀려버린 마블 스튜디오의 MCU 전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해진 이번 이벤트는 성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