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얼굴>은 펍지유니버스 단편영화 프로젝트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태이고의 진실’을 전하는 2부작 단편 Part1 <그라운드 제로>, Part2 <방관자들>이 사건을 직접 보여준다면 <붉은 얼굴>은 그 잔혹한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1997년 태이고시에서 일어난 삼포조선 사택 참사의 유일한 생존자인 오준서(육준서)는 화가가 되어 그날의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화가 오준서의 회고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붉은 얼굴>은 독특한 모큐멘터리다. 예능 프로그램 <강철부대>를 통해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아티스트 육준서가 주연을 맡은 이번 작품은 한편의 단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오준서라는 캐릭터 자체가 아티스트 육준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종의 아트 컬래버레이션이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출발하여 미디어 전반으로 확장 중인 펍지유니버스 세계관에 이렇게 어울리는 프로젝트도 없을 것이다. 과연 그날 태이고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붉은 얼굴>을 통해 첫 연기 데뷔를 한 육준서를 만나 이번 컬래버레이션에 대해 물었다.
- 펍지유니버스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평소 게임 <배틀그라운드>에 관심이 있었나.
= 게임을 직접 하진 않지만 플레이하는 건 많이 봤다. 아무래도 군인 출신이라 관심도 있었고, 주변에 게임하는 친구들이 많다. 농담처럼 전투 훈련하러 가자고도 하고. 인스타그램 DM을 통해 제안을 받았는데, 마동석 배우가 출연한 단편 <그라운드 제로>에 이어지는 또 다른 단편에 출연해보겠냐는 이야기에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다만 연기 경험이 없어서 망설였는데 적극적인 설득에 용기를 냈다.
- <붉은 얼굴>을 통해 첫 연기 데뷔를 한 셈인데.
= 연기 데뷔라는 인식은 크게 없다. 펍지유니버스에서 제안했던 것도 캐릭터를 연기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아트 컬래버적인 관점에서 프로젝트가 만들어졌다. 시나리오 기획 단계부터 내가 가진 특성이나 배경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흥미로웠다. 내가 오준서라는 캐릭터가 되어 시나리오대로 연기하는 게 아니라 오준서라는 인물이 나를 반영해 만들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름부터 ‘준서’니까. (웃음)
- 요즘 말로 ‘부캐’라고 해도 좋겠다. <붉은 얼굴>은 화가 오준서를 인터뷰하는 구성으로 전개된다. <강철부대>를 통해 대중에 이름을 알리기 이전부터 아티스트로 꾸준히 활동해왔다.
= 정체성을 묻는 거라면 나는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번 단편 역시 단순한 출연이 아니라 게임 회사랑 독특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감각으로 시작했다. 전문 연기자가 아닌 만큼 작가로서 인터뷰하는 구성이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부분도 있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나가면서 완성한,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 2020년 <Red Portrait>, 2021년 <Self Portrait>라는 개인 전시를 진행했다. <붉은 얼굴> 자체가 어쩌면 그 연장선에 있는 작업처럼 보인다.
= 그동안 내가 진행해온 작업은 그때,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면서 즉흥적으로 어떤 요소를 극대화해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이번에 펍지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도 어떤 감정에 충실하게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야만 했고, 그게 오준서라는 캐릭터의 배경과도 연결된다. 덧붙여 이번 작업은 아트 컬래버적인 요소가 있는 만큼 펍지유니버스에 어울릴 그림을 그려내는 것도 중요했다.
- 극중 오준서는 어린 시절 일어난 사건으로 얼굴의 절반에 화상을 입었다.
= 오준서가 그린 작품들이 그래서 중요했다. 이번 단편은 내가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화가 오준서의 작품들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때문에 트라우마를 형상화하는 게 필요했다. 그렇다고 너무 직접적인 표현을 하고 싶진 않았다. 지나치게 추상적이면 설명이 어렵고. 최대한 다양한 질감의 재료로 오준서의 작품을 만들어보았다. 트라우마가 있는 과거의 장소에서 나온 흙이나 돌, 나뭇잎 등을 활용하는 식이다. 과거의 기억을 다시 물질화한다고 봐도 되겠다.
- 오준서는 어떤 캐릭터인가.
= 화재로 인해 고향은 물론 얼굴의 절반을 잃은 인물이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안고 화가가 되어 그 기억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살아가기 위해서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움, 복수심 등 그의 다양한 감정이 그림을 통해 표현된다고 보면 된다. 작가로서 내가 가진 고민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다가갈 수 있었다.
- 작가 육준서와 화가 오준서의 경계가 흐려지는 부분이 재미있다.
= 전문 연기자가 아님에도 감정이입이 좀더 수월했던 건 그런 지점 덕분이었다. 어쩌면 이번 <붉은 얼굴>이 작가로서 즉흥적인 감정을 표현했던, 굳이 이름을 붙이면 ‘Portrait’ 시리즈의 마지막 자락에 있다고 봐도 된다. 앞으로는 나의 감정과 거리를 확보하는 형태의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그 끝자락에 펍지유니버스의 <붉은 얼굴>은 나의 이전 작업들을 종결하고 매듭짓는, 터닝 포인트로 기억될 것이다.
- 작가 육준서의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될까.
= 올해 전시회를 계획 중이다. 즉흥적인 감정의 표현보다는 구체적인 계획과 로드맵이 있는 상태에서 좀더 거대한 그림을 그려나가고 싶다. 그게 회화의 형태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방식의 미술이 될지도 모르겠다. 국외 활동도 염두에 두고 있다. <강철부대> 덕분에 얼굴이 알려졌는데, 타국에서 작품만 놓고 내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직접 겪어볼 생각이다. 장기적으로 한 사람의 미술가로 자리매김하고 싶다.
- 연기자로서도 이제 첫발을 디딘 셈인데.
= 글쎄, 아직 실감은 안 난다. 일단 연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이번 작업은 전문 연기라기보다는 경계에 있는 아트 컬래버 같은 거였으니까. 다만 간접적이나마 연기가 무엇인지 경험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의 미술 작업의 연장에 있는 연기라면 뭔가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미디어 아트라든지 일종의 퍼포먼스로서. 이번처럼 영상 형태의 작업물의 일부가 되는 것도 좋고. 스펙트럼을 넓혀보았다는 점에서 아주 조금 자신감이 붙은 상태다. (웃음)
- 그런 의미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단편영화 제작이 아니라 기존의 경계나 인식을 뛰어넘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 맞다. 그래서 참여했고, 내게도 소중한 경험이 됐다. 큰 맥락에서 본다면 미디어 아트쪽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앞으로 펍지유니버스에서 화가 오준서가 또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쓰임이 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