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말할 때 서사 너머의 형식이 중요한 것처럼 책으로 새로 탄생한 각본집 또한 물성이 있는 출판물로서 구성의 새로운 미학을 갖는다. 이를테면 도서출판 아를에서 펴낸 <시>를 열면 시나리오 본문을 만나기 전에 ‘아녜스의 노래’를 먼저 읊조리듯 읽어야 한다는 것. 책의 초입에서 어느 가만한 음성을 복기하고 나면, 이어지는 <시>의 대사들에서 모두 양미자(윤정희)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시 수업 학생들이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고백하는 희곡적 독백은 활자로 읽을 때 새삼 도드라지는 문학성이 반갑고, 손자와 배드민턴을 치던 중 셔틀콕이 나무에 걸려 미자가 쩔쩔매는 동안 경찰이 손자를 연행하는 장면은 시나리오의 섬세한 묘사와 더불어 콘티까지 함께 만날 수 있어 명장면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영화의 극장 상영용 프린트에 맞추어 일부 대사와 지문을 수정한 최종본 시나리오가 반영된 <시>는 그 덕분인지, 장면 하나하나를 생생히 복기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서두에서 미리 만났던 아녜스의 노래가 시나리오의 말미에서 10개 신이 연결된 긴 몽타주로 심상화될 때, 그 과정을 옮기는 정연한 문장들을 차근차근 읽어낼 때, <시>는 시가 된다. 흩날리는 필체로 초기 구상을 써내려간 이창동 감독의 작가 노트를 훔쳐볼 수 있는 것도 큰 묘미다. 그는 ‘여백이 많은 영화’라고 수첩에 적은 뒤 그 주위를 네모 반듯이 몇번이나 둘러치고는, ‘참고할 것! 레이먼드 카버 so much water so close to home(국내 출간 제목은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편집자)’이라고 적어두었다. 수기 노트를 그대로 스캔한 이 페이지들을 몇장 더 넘기면, 프랑스의 시인 클로드 무샤르와의 대담에서 이창동 감독이 초기에는 카버 같은 구조를 생각했으나 너무 익숙한 플롯이 되지 않을까 저어했다고 고백하는 순간도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시(poetry)가 신(scene)으로, 혼자만의 구상이 상호적인 대화로 이어지는 <시>는 내러티브가 훌륭한 각본집이다.
역시 아를이 출판한 <버닝> 각본집에선 오정미 작가와 이창동 감독의 유기적인 협업 관계가 부각된다. 두 사람의 대화, 두 사람의 독백이 군데군데 어우러져 있다. 책 집필과 영화 제작에 이르는 전반의 과정을 함께한 사람만이 문득 할 수 있는 말들이 페이지 사이에서 튀어나온다. “4시부터 슛. 2테이크 만에 OK. 종수가 살인 후 벗고 걸어가는 장면, 좋았음.”
그리고 <시>와 <버닝>은 시나리오 본문만큼이나 구체적이고 길이가 긴 시놉시스, 그 자체로 단편소설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트리트먼트를 한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귀한 교재가 되어줄 것이다.
출판사 클에서 단정한 양장본으로 출간한 <윤희에게>는 군더더기 없이 시나리오의 정서를 다시금 체험하도록 유도하는 일에 충실하다. 책장을 열면 독자가 곧장 오타루 여행 속으로, 언젠가 부치지 못한 편지의 자장 속으로 스며들기를 유도한다. 줄 간격을 넓게 처리해 여백을 살린 편집은 슴슴한 성격의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감각하게 한다. 꾸밈과 과장 없는 지문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시나리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윤희에게, 그리고 쥰에게로 시작되는 편지가 한글과 일본어로 각각 놓여 있다. <윤희에게> 각본집은 바로 이 편지를 편지답게 읽기 위한 기다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내레이션으로 접했던 편지를 실물로 만나는 순간의 감흥까지 달려나간 뒤에야, 임대형 감독, 그리고 배우 나카무라 유코의 인터뷰가 관객에게 답신을 띄운다.
플레인 아카이브가 펴낸 두편의 각본집 <미쓰 홍당무>와 <남매의 여름밤>은 영화가 아닌 각본을 대할 때 비로소 더 드러나는 감독들의 마음가짐, 그 미세하게 더 자유로운 각도가 곳곳에 드러난다. 보통 각본집은 영화와 시나리오를 사유한 기자, 평론가, 학자, 아티스트 등의 다양한 필자들이 원고를 보태거나 창작자와 대화를 나누는 형태의 자료들이 부가적인 재미를 주지만, 데뷔작 <미쓰 홍당무>의 음침한 이경미 세계를 가장 잘 해부할 이는 감독 자신이라는 듯 호기롭게 써내려간 ‘이경미 감독의 열 가지 각주’가 아기자기한 재미를 낸다. 읽다보면 뜨끔하는 순간도 있다. “양미숙의 여고 시절 단체사진은 말이지, 다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저런 사진을 정말 찍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가 본데 그것만큼은 절대 아니다.” <남매의 여름밤> 각본집에서는 윤단비 감독의 가까운 동료 김기현 촬영감독이 빈집의 풍경을 포토 에세이로 풀어내 노스탤지어 가득한 영화의 감상을 복원했다. 남매를 연기한 최정운, 박승준 배우의 손편지도 유독 정겹다. 알아보기 힘든 삐뚤빼뚤한 글씨로, 박승준 배우는 다짜고짜 이렇게 편지를 연다. “저는 누나가 있습니다. 평소에 집에서 누나랑 많이 싸워서 누나랑 싸우는 부분이 젤루 쉬웠던 것 같아요.”
이승원 감독의 날것 그대로인 정서가 가득한 무삭제판 시나리오를 담은 <세자매 이야기>는 허은실 시인의 시로 문을 연다. 시 <그 언니, 에게>에서 시인은 “있잖아요 언니 나는, 그게 가장 무서워요. 눈빛이 닮아가는 것”이라고 썼다. 아버지의 폭력에 얽힌 가족의 역사로부터 세 자매가 트라우마를 대면하는 순간에 서서히 다가가는 이 영화에서 끝내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것, 그러나 세 자매의 마음에 아직도 서슬 퍼렇게 남아 있을 폭력의 눈빛을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다. 이어서 제작자로 첫걸음을 뗀 배우 문소리의 진솔한 고백을 담아낸 제작기가 뚜렷한 개성을 더한다. 허은실의 시, 문소리의 제작기를 경유해 시나리오로 나아가면서 세심하게 본론에 다가가는 책의 태도가 영화와도 신기하게 닮아 있다. 한편의 비망록처럼 다가오는 각본집이다.
플레인 아카이브에서 발간예정인 신작 <고양이를 부탁해>는 20주년의 의미를 담은 만큼 더욱 특별하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보존해 촬영,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장면들까지 그대로 품은 <고양이를 부탁해>는 시간의 세파를 뚫고 살아남아 한결 애틋한 데다 영화와 책을 나란히 비교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2000년 1월29일 크랭크인해 2000년 6월15일 크랭크업한 촬영 현장에서 정재은 감독이 실제로 사용한 상세한 스토리보드의 스캔본을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인데, 스토리보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숏의 미학을 집요하게 추구했던 젊은 감독 정재은의 집념을 감각하게 될 것이다. 프레임의 내부만 완벽하게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 전체를 꼼꼼히 조망하고 동선을 설계하는 능력이 엿보이는 자료다. 인물과 주제를 꾸리는 사려깊음과 더불어 공간에 대한 정재은 감독의 관심과 남다른 감각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자료들이다. <혼자를 기르는 법>을 그렸던 김정연 만화가의 작업, 배우 배두나와 ‘모임 별’ 조태상 프로듀서의 에세이,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인터뷰가 꼬리를 이으며 “모호하고 막연한 방향을 점차 책(시나리오)으로 물질화시키는 작업”의 의미를 20년의 세월을 두고 예리하게 관통해낸다.
완성된 영화와 책으로 나온 각본은 서로 운명적이고 유기적인 만큼이나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하나의 정신을 다른 질감으로 곱씹는 경험 끝에 도착한 자리는 다시 출발점이다. 문득 <시>에서 이창동 감독이 들려준 어떤 확신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영화의 경우에는(아마도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겠지만), 시나리오를 읽는 것이 그 영화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