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해외영화 각본집: 그들이 서로 마주본 순간
2022-01-30
글 : 이다혜
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이야기> <희극과 격언1, 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토드 헤인스 감독의 <캐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각본집

해외영화 각본집이 한국에서 출간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해당 국가에서 각본집이 출간된 경우여야 번역본을 출간하기 용이한데 출간 사례는 드문 편이고, 해외영화 각본집은 한국영화 각본집처럼 콘티, 감독 인터뷰를 포함해 다양한 부가 자료를 추가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플레인 아카이브에서는 <캐롤>을 필두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각본집을 펴냈다. <캐롤>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각본집은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출간되었다. 두 영화 모두 한국에서 팬층이 두터웠는데, <캐롤>은 한영 각본집으로, 각본가 필리스 나지의 최종 버전 시나리오와 제작자 엘리자베스 칼슨의 서문이 실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불 각본집은 예약 판매 형식으로만 판매되었기 때문에 현재 중고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중이다. 두 각본집 모두 대사만큼이나 지문의 비중이 높아 영화를 글로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때로는 소설을 읽는 듯할 정도다. <캐롤>의 각본은 필리스 나지가 촬영 직전까지 작업한 버전. 당연하게도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장면들을 포함한다. 캐롤과 테레즈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애비와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글로 읽을 수 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캐롤>(<소금의 맛>이라는 제목으로 최초 출간)을 영화화한 <캐롤>은 알려진 바대로 하이스미스의 자전적인 경험을 담았다. 각본집에 실린 시놉시스는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이 존재하는 상반된 위치를 요약해 보여주는데, 첫 세 문장은 이렇다. “1952년 뉴욕. 캐롤은 우아하고, 세련되고, 부유한 유부녀다. 테레즈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한 나이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불 각본집은 영화를 연출한 셀린 시아마 감독이 쓴 원고와 더불어, 클라라 박의 비평 ‘다가오는 폭풍 속에서 불타는 신화’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주최 ‘2019 각본가 강연 시리즈: 셀린 시아마’ 녹취록을 함께 실었다. 주인공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함께 있는 장면들을 보면, 대화가 시작되면 지문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고이며 지문이 살아난다. 지문은 때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상황의 내막과 인물의 심리를 그려내 읽는 재미를 준다. ‘57-1. 황무지, 야외, 낮’ 신은 지문만으로 되어 있다. “마리안느는 황무지를 뛰어가며 엘로이즈의 모습을 찾기 위해 지평선을 샅샅이 살핀다. 긴급 상황이다. 일분일초가 사라지고 있다.” 바로 연결되는 ‘57-2. 해변, 야외, 낮’ 신의 도입부 지문은 앞신의 연장이면서 상황의 반전이다. “마리안느는 썰물의 해변으로 뛴다. 단조로운 갈색의 바위로 가득 찬 황량한 풍경. 마침내 그녀는 엘로이즈를 발견한다. 녹색 드레스를 야외에서 보는 것이 낯설다. 그림이 살아난 것 같다. 마리안느는 그녀에게 몸을 던진다.” 연인들의 시간은 절박할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가는 중이다. 드레스를 움켜쥐고 뛰어다니는 여인들의 움직임이 선명히 보이는 듯하다. 감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그들의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과 그 경험에 관해 이야기할 뿐”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래서 저는 장애물과 적, 함정, 남자들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어요.”

에릭 로메르 감독의 <희극과 격언> 연작과 <사계절 이야기> 연작은 로메르 탄생 100주년이자 10주기를 맞은 2020년, 출판사 고트에서 총 3권의 책으로 펴냈다. 감독의 작품 세계를 연작 단위로 접할 수 있으며, 대사를 통해 사색적이고 때로 유머러스한 전개를 선보인 특유의 순간들을 글로 볼 수 있다. 로메르 감독의 영화들을 쉽게 접하기 어려운 까닭에 더 귀하게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사계절 이야기>에는 <봄 이야기> <겨울 이야기> <여름 이야기> <가을 이야기> 각본이 실렸다. 화면에 두 사람(이상)이 있고, 그들이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으며 속내를 드러내고 상황을 전개시키는 로메르 영화 특유의 말의 향연보다 각본집에 잘 어울리는 것이 있을까. 말이 역할을 다하기 때문에 지문은 최소한의 지시 사항만 전달한다. 도덕과 사랑, 욕망과 종교, 고독과 어울림 모두 대사로 표현된다. 영화는 계절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잘 드러내는데, 흐르는 시간을 선명히 보게 한다. <희극과 격언1>에는 <비행사의 아내> <아름다운 결혼> <해변의 폴린>이, <희극과 격언2>에는 <만월의 밤> <녹색 광선>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가 수록되었다. 모든 생각과 가능성이 발화되어야만 하는 로메르의 인물들은 현실적으로 추상적이다. 다음과 같은 대사는 로메르 영화의 전형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인생처럼 시간 속에 존재하는 거니까.”(피에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건 맞지만, ‘현재’의 시간 속에 있지. 피에르 당신은 미래에 사는 거야.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에. 그건 사는 게 아니지.” (앙리)(<해변의 폴린>) 말로 하는 사랑에 대해서라면 로메르를 따라올 이는 없겠으나, 각본을 다 읽어도 영화는 또 새로운 작품으로 다가올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한일 각본집 역시 플레인 아카이브에서 출간했다. 일본어 각본을 살피는 재미가 있는데, 어린이 배우들의 대사를 쓸 때는 고레에다 감독이 지시 사항을 길게 쓰는 대신 어린이의 입말에 가깝게 대사를 글로 표현했음이 더 잘 보여서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더 선명히 전달하는 대본인 셈이다. 감탄하기, 길게 끌며 말하기, 망설이기를 비롯한 감정이 지문 아닌 대사로 표현되어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배경음악이나 음향효과가 ‘어느 장면부터 어느 장면까지’ 나와야 하는지가 지문과는 별개로 자세히 적혀 있다는 데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케이타의 피아노 발표회장 신 옆에는 “케이타가 치는 피아노 떴다 떴다 비행기”가, 다른 아이의 연주 신 옆에는 “피아노 서정 소곡집 제1권: 요정의 춤”이라고 적혀 있다. 특정한 음향 트랙이 장면에서 지속적으로 쓰일 때 역시 화살표로 시작과 끝을 표기했다. 가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섬세하게 담아내는 고레에다 감독의 각본집을 읽으면, 집이라는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대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지에 생각이 미친다. 말줄임표가 많아질 때, 그 순간 카메라는 가족의 공간을 미동도 않고 담아내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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