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 같다. 세대와 성별을 가름해 서로를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일부 정치인의 의제를 마주할 때마다 내 존재가 지워진 것 같다. 변화가 오고 있다. “나빠지는 것도 변화는 변화니까.”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의 주인공 채진리는 1990년생 고등학생이다. 어느 날 진리는 쿵 소리와 함께 뒤틀린 세상을 마주한다. 학교의 교사와 남자애들은 같은 반 여자애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존재를 부정한다. 우리 학교에 너 같은 애는 없었어. 집단 기억상실에라도 걸린 듯 학교는 남자 고등학교로 명패를 바꾸고 여자애들은 세상에서 지워진다. 남에게 못된 말을 할 줄 모르던 남자 친구 훈우는 다른 사람이 된 듯 “소수의 의견 따윈 무시해도 된다”며 못되게 군다. 진리의 절친 해라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해라의 집을 찾아가도 “우리 집에 딸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학교는 여자애들을 기억하는 ‘우리’와 잊어버린 ‘쟤들’, 두 세계로 나뉜다. 여자애들을 부정하는 쟤들은 말한다.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너무 많은 걸 양보했다고. 여자애들은 군대도 안 가잖아? 우리보다 인생이 2년이나 긴 셈이야.” 남자애들은 예쁜 옷을 좋아하는 크로스드레서 예준을 변태좀비라며 조롱하고, 장애인 계수가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같은 학교 시설인데 누구는 이용하고 누구는 차별받고 이게 뭐냐”라며 특권과 역차별을 교육부에 고발하겠다고 나선다. 진리는 생각한다. “세상이 좋은 곳이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왜 더 이상한 곳에 머물고 있을까?"
1990년 백말띠해에 태어나야 했을 여자애들이 ‘지워진 존재’가 되었다는 상상에서 출발한 소설은 2022년 한국의 현실을 소름 끼치게 닮았다. 여자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교 남자애들의 발언을 상세히 받아 적은 이유는, 지금 그 말들이 우리 귀에 자주 들리는 강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대로 우리에겐 더 많은 무기와 목소리가 필요하다. 세상은 더 좋아질 수 있으니까. 그러니 당신도, 나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더 크게 목소리를 낼 거야
“우리, 더 뻔뻔하면 좋겠어. 비겁하게 냉소하거나 무책임하게 쌍욕만 퍼붓는 사람들은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걸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것일 뿐이야.”예준이를 외롭게 내버려두는 세상은 내게도 외로운 세상이었다. 예준이가 절망하는 세상은 날 위해서라도 그냥 두어선 안 됐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도 남을 상관해야 했다.(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