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극장가에 출사표를 던진 <해적: 도깨비 깃발>과 <킹메이커>가 각각 관객수 129만명, 75만명(2월23일 영화관입장통합전산망 기준)을 기록했다. 두 작품 각각 450만명, 200만명으로 추정되는 손익분기점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스코어다. 영화계에서는 이번 설 영화 성적표를 두고 극장산업 붕괴의 전조를 읽거나 전략의 부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영화 배급과 흥행>을 쓴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는 “<해적: 도깨비 깃발>과 <킹메이커>보다는 더 확실한 카드를 제시했어야 했다. 국내 관객수 751만명을 돌파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극장을 붐업시킨 이후였고, 올해 설 연휴 시기도 좋았고, 마침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화됐는데 그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콘텐츠만 좋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번엔 워낙 오미크론 확산세가 거셌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라는 입장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및 극장 영업시간 제한으로 팬데믹 이전 수준의 좌석 수를 보장받지 못했고,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다시 증폭되면서 극장으로 관객을 유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설 연휴 개봉을 결정한 투자배급사에서도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임아영 롯데엔터테인먼트 홍보마케팅팀장은 “지난해 12월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이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흥행 성공을 보면서,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는 가족 관객 타깃의 어드벤처영화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해적: 도깨비 깃발> 개봉의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설 연휴 직전 오미크론 확산으로 극장 나들이에 대한 관객의 우려가 커져서 전체 극장 시장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이 아쉬운 성적을 낳은 이유였다고 덧붙였다. <영화는 배급이다>를 집필한 이화배 스튜디오에이치엘 이사는 “흥행 성공 여부보다 우려되는 것은 관객이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영화관을 방문하는 현상이 사라지고, 막대한 제작비와 광고비를 들인 소수의 영화만이 개별적으로 관객을 동원하는 시장으로 변하는 것”임을 지적하며 전통적인 시장이무너지는 현상을 우려했다. 익명을 요구한 홍보대행사 대표는 “일반적으로 개봉일에 맞춰 사전 인지도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방식으로 순차적인 마케팅 전략을 짜는데, 잇단 개봉 연기로 신작들의 홍보 효과가 분산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투자배급사와 극장을 모두 갖고 있는 대기업이 움직여야
한국 극장산업이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영화가 관객을 견인하고 관객이 또 다른 신작 개봉을 이끄는 선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자들을 더욱 애타게 만드는 것은 해외 시장의 회복세다. 2019년 세계 4위를 기록한 한국 극장산업은 2021년 8위로 추락했다. 2021년 중국, 미국, 영국은 전년 대비 90% 이상 극장 매출을 회복했지만, 한국은 불과 14.5% 증가에 그쳤다. 이중 북미 극장가가 다시 활력을 찾은 것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베놈2: 렛 데어 비 카니지> <블랙 위도우> 등 새로운 대작들이 계속 개봉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은 오미크론 공포가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에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개봉 첫주 4336개 극장에서 2억6천만달러 매출을 기록하며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오프닝 성적을 올렸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고무적인 성적에 톰 로스먼 소니 픽처스 모션 픽처 그룹 회장은 “전세계와 많은 도전에 직면한 역사적인 결과는 독점적인 극장영화가 비전과 결의를 갖고 제작되고 홍보될 때 가질 수 있는 문화적 영향을 재확인시켜준다” (<할리우드 리포터>)라며 낙관적인 코멘트를 남겼다. 극장 체인 AMC의 애덤 아론 대표는 그의 트위터에 “파멸의 예언자들이여, 목을 졸라라” (#CHOKEonTHAT)라며 자신만만한 글을 올렸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폭발력이 곧 미국 극장산업 전체의 부활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기예르모 델 토로의 <나이트메어 앨리>, 스티븐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관객의 마음까지 사로잡지는 못했다. 현지에서는 코로나19로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나이 든 관객이 선호할 만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분석한다. 여기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좀더 적극적인 소비층이 움직일 만한 영화가 선두에서 관객을 끌어올 수 있게끔 판을 짜는 전략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물론 할리우드와 한국 시장의 근본적인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조성진 CJ CGV 전략지원담당은 “해외영화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지만 한국영화는 한국 시장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 실패하면 큰 손해를 봐야 한다. 그래서 해외 대작들은 계속 개봉을 하고 한국영화는 그러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장은 소폭의 회복세에 비해 유의미한 제스처가 없다. 실제로 올해 1월1일부터 2월24일까지의 관객수는 총 847만여명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 대비 거의 2배 이상 증가했지만, 관객이 다시 극장을 찾는 습관을 되찾을 만큼 힘 있게 신작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이하영 대표는 “매주 스코어만 보고 판단하면 영화를 개봉시킬 수 있는 날짜가 없다. 마냥 개봉을 미루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라고 비판했다. “할리우드는 <더 배트맨>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등 대작이 계속 개봉한다. 길게 보고 여름 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여름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3~4월 라인업부터 준비되어야 한다. 매주 한편씩 새로운 영화를 공격적으로 개봉시키면 6월 이전에 예전 시장의 50%를, 여름에는 70~80%, 겨울에는 90%까지 회복할 수 있다. 코로나 이전 시장의 50%만 회복하면 100%까지 다시 올라가는 데 얼마 안 걸린다. 올해 여름 시장을 살리지 못하면 극장산업은 끝난다.” 하지만 투자배급사 입장에서는 한치 앞이 불투명한 상황에도 영화를 꾸준히 개봉해야 한다는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영화는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얽혀 있는 산업이다. 조수빈 홍보팀장은 “한편 한편 손해가 명확한 상황에서 개봉을 결정하려면 많은 이해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 투자배급사 입장에서는 시장 외적인 이유가 아닌 영화 자체로 충분히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영화를 개봉하고 싶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도 적자를 예상하며 상품을 선보일 회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배 이사의 말처럼 “팬데믹 이전에도 시장이 불안정하거나 비수기에는 상대적으로 예산이 낮거나 주제나 소재 면에서 개성 있는 장르영화들이 개봉한” 점을 생각했을 때 선뜻 대작을 배치하자고 결정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다. “시장 회복이 먼저냐, 대작 영화 개봉이 먼저냐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오는 3월 쇼박스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의 <뜨거운 피>가 개봉하고 나면 다른 한국영화들도 용기를 내서 개봉을 결정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영화관 시장에서의 매출 손실을 보전할 만큼 온라인 시장에서 영화의 약진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극장의 반등에 아직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그사이 한국영화는 <승리호> <낙원의 밤> <사냥의 시간>처럼 OTT 독점 공개로 방향을 전환하거나, <서복> <미드나이트> <해피 뉴 이어>처럼 극장과 OTT 동시 공개를 택하거나, <자산어보> <해적: 도깨비 깃발>처럼 홀드백 기간을 단축하는 대신 손해를 줄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미국 시장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변화다. 최근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장기간 극장 상영보다는 45일간 극장에서 독점 공개 후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상영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팬데믹 기간 동안 공개 방식을 다변화하고 다양한 실험을 거친 결과 자리 잡은 관례다. 그렇다면 극장과 OTT의 협력이 새로운 스탠더드가 될 것인가? 원동연 대표는 “극장은 장치 산업이다. 초기 투입 비용이 너무 크다. 때문에 OTT와 무조건 협업하는 방향으로 가기는 어렵다”라고 진단한다. 조성진 전략지원담당 역시 “원래 영화가 수익을 가장 많이 낼 수 있는 곳은 극장이다. 시장이 안정되면 굳이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길을 버리고 OTT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OTT의 무서운 성장세가 결국 극장산업을 붕괴시킬 것이라는 비관론은 너무 섣부르다는 것이다. 때문에 극장영화에서 OTT나 TV드라마 진출로의 완전한 이행은 반드시 수익극대화를 위한 길이 아닐 수 있다. 무엇보다 극장과 OTT는 서로를 배척하는 라이벌이 아니라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다. 과거 TV와 비디오의 등장이 결국 극장산업과 상생이 가능했듯, OTT도 유사한 수순을 따를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충분한 홀드백을 보장하며 영화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이화배 이사는 “국내 영화시장에서 영화관과 주문형 비디오(VOD) 사이의 홀드백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 “단편구매(TVOD)와 구독제(SVOD)간의 매출 잠식 문제”로까지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다양한 유통 방식이 수익을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홀드백이 무너지면서 영화의 소비 기간도 짧아졌다. 시장 변화에 맞춰 영화의 유통 전략을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고가의 문화상품이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쉽게 사라지는 것은 영화산업에 치명적인 독이다. 영화의 생애주기를 늘려서 창작자와 제작자, 투자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을 OTT라는 새로운 플레이어와 같이 찾아야 한다."
이미 제작이 완료된 영화는 개봉을 하지 않고, 시장이 침체되면서 신작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도 위축되고 있다. 대신 많은 투자배급사들이 영화 외에 드라마, OTT 등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며 다른 영역에 뛰어들고 있다. 때문에 극장산업이 언젠가 회복될 수 있다는 의견 역시 전적인 낙관론이 될 수 없다. 조성진 전략지원담당은 “하반기에 2019년 시장 대비 60~70%까지 회복하지 않을까 예상”하면서도 과열화될 경쟁 구도를 걱정했다. 너무 많은 영화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오면 오히려 모두에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각 투자배급사가 신작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2~3년 후 충분한 영화가 나오지 않아 산업이 어려워질 수 있을 것”(조성진 전략지원담당)이란 문제도 지적됐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틈새시장을 노리는 발상도 가능하다. 가령 앞서 언급한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여기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조수빈 쇼박스 홍보팀장은 “방역 지침이 완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봄 시즌에 진정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면 입소문으로 롱런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전했다.
때문에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런 회복을 기다리기보다는 극장 및 정부 차원에서 과감한 지원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현재 추진 중인 정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영화산업의 위기를 개선하고 선순환을 제고하기 위해 한국영화 신작 개봉을 촉진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전국 430여개 멀티플렉스와 120여개 중소 영화관이 대상이며, 총지원규모는 81억5천만원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코로나19전담대응TF(이하 코로나19전담대응TF)측은 “영화관, 배급사 등 현장 관계자들은 현재 팬데믹으로 기존 마케팅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작아진 상황에서 개봉 촉진이 가장 필요한 지원정책이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영화관과 배급사 모두를 지원할 수 있는 특별기획전을 검토했다”고 이번 사업을 설명했다. 3~4월은 전통적으로 비수기에 속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5월 가정의 달과 7~8월 여름 시장의 분위기를 예열할 발판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코로나19전담대응TF측은 “개봉 준비를 위해 6주 정도의 마케팅이 필요한데, 현재 3~4월 개봉작이 없다고 판단하여 2월 공고를 시작해 3월에 개봉 촉진 지원 작품이 관객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100편 넘게 개봉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이 지원 규모는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엔 역부족이다. 조성진 전략지원담당은 “이번 특별기획전 사업의 예산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아쉽긴 하다. 지난해 <모가디슈>와 <싱크홀> 같은 대작들이 제작비 50%를 회수할 때까지 한국상영관협회가 수익을 보장한 것처럼 과감한 지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입장이다. 원동연 대표는 “제작비가 크게 드는 영화는 손실 또한 크기 때문에 개봉하기가 쉽지 않은데, 중간급 영화들이 시장에 나갈 수 있도록 혜택을 많이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그가 촉구한 것은 CJ ENM이나 롯데엔터테인먼트, 메가박스처럼 투자배급사와 극장을 모두 갖고 있는 대기업의 움직임이다. “자사의 영화를 개봉시키거나 다른 영화에 혜택을 주는” 등 업계 선두주자들의 결단이 있어야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분위기에서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으므로 각자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희망은 남아 있다
많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걸 수 있는 희망의 근거가 있다. 산업의 부활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공동의 위기의식은 아직 소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례로 2월22일 503명의 영화인은 현 정부와 각당 대통령 후보들에게 한국영화 위기 극복을 위한 비상정책을 제안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계속되는 업계의 요청에 정부 차원에서도 배급사 및 극장 지원 외 영화계 지원 방책을 준비 중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코로나19전담대응TF측 역시 ”코로나19 장기화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화 콘텐츠 제작 관련 인력운용 지원에 약 11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확정되었으며, 추후 업계 간담회 등을 통해 사업 규모, 시기, 내용 등을 검토하여 시행할 계획“이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위기 속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온 한국영화계가 아직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절실함을 안고 모두가 바뀌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