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규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은 대체로 법과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다. <범죄도시>의 행동대장 양태에서 <악인전>의 연쇄살인마 K까지, 야생의 눈빛으로 작품에 뜨거운 온도를 더하던 그가 <돼지의 왕>에서 이전에 연기했던 인물들을 쫓는 정반대의 역할을 맡았다. 정종석은 뛰어난 실력으로 젊은 나이에 차기 광역수사대 팀장직을 예정할 만큼 유능한 형사다. 20년 동안 만난 적 없는 중학생 시절 친구 경민(김동욱)이 남긴 메시지를 보고 또 다른 살인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그에게도 사실 숨겨진 과거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던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많진 않았다”는 부담감도 물론 있었지만, 평소 생각이 많은 배우답게 정종석의 소우주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단다. 그에게 <돼지의 왕>은 “작품은 물론 배우라는 일 자체가 정말 쉽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현장이었지만, 극 후반으로 갈수록 드러나는 종석의 다면성은 김성규 본연의 에너지와 만나 설득력을 입는다.
- <돼지의 왕>의 정종석이란 인물은 어디서부터 시작해 만들어나갔나.
= 이전에는 장르성이 강한 작품에서 판타지적 요소가 많은 인물을 주로 연기했기 때문에 추상적인 이미지로부터 캐릭터를 구체화해나갔다. 이번에는 달랐다. 대본을 읽는 개인 작업실에 학창 시절 사진들을 걸어놓았다. 남중·남고를 나왔는데 그간 거쳐왔던 학교생활을 많이 떠올렸다. 내가 다닌 학교에는 <돼지의 왕> 대본에 묘사된 것보다 더 심한 폭력이 존재했다. 동명의 원작 애니메이션처럼 뚜렷한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위 일진 친구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비슷한 친구들끼리 모여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 역시 있었다. 한편으론 내가 종석만큼 폭력을 당해본 입장은 아니기 때문에 종석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중학생 때 나는 소위 일진도, 공부를 잘하지도 않는 무난한 학생이었으니까. 기본적으로 정종석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계속 달려나가는 캐릭터다. 그 점을 많이 생각하며 연기했다.
-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영화 <돼지의 왕>에서 종석은 인생이 잘 풀리는 않는 작가로 묘사된다. ‘돼지’로서의 삶을 현재 시점에서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반면 드라마 <돼지의 왕>에서 종석은 거침없는 추진력을 보여주는 에이스 형사다. 원작과 설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텐데.
= 드라마에서는 종석의 사생활이 나오지 않는다. 종석은 과거에 매달리기보다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캐릭터다. 그가 거쳐온 20년의 시간이 등장하진 않지만 과거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 처절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어린 종석에게 형사는 굉장히 강하고 큰 존재였고, 형사라는 직업에서 단단하고 강한 모습을 발견했다. 경찰대학교를 나와 엘리트 코스를 밟고 광역수사대에서 인정을 받을 만큼 정의로움에 집착하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닐까. 겉으로 보기에는 인정받고 능력 있는 형사처럼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다.
- 시기상으로 보면 교도소 내 최상위 권력자 도지태를 연기한, 쿠팡플레이의 <어느 날>을 찍은 이후 <돼지의 왕>에 합류했더라. 역할은 완전히 다르지만 선 굵은 남성성을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들이다.
= 지금까지 했던 작품들은 어두운 곳에 혼자 있는 초췌한 캐릭터들이라 살을 많이 뺐다. <어느 날> 때는 다이어트를 하면서 운동을 굉장히 열심히 했고, <돼지의 왕>도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짬짬이 운동을 계속 했다. 하지만 초반엔 말끔하게 나오는 <돼지의 왕> 역시 사건이 하나씩 일어날수록 점점 초췌한 얼굴로 바뀔 것이다. (웃음)
- 그동안은 종석이 아니라 경민처럼 잔혹한 살인마가 되는 캐릭터를 더 많이 연기해왔다.
= 배우 일을 하면서 언젠가 형사를 연기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연기할 형사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고. 막상 대본을 받았을 땐 그동안 했던 역할과 너무 달라서 이게 가능할지 솔직히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땐 그동안 내가 불안하고 위태로운 연기를 주로 해서인지 경민 역할에 좀더 공감을 많이 했던 것도 같고.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을 마주치면 상대가 날 약하거나 만만하게 보지는 않는다. 그런 면은 형사의 어떤 모습과 맞지 않을까. 그전에는 현장에서 혼자 있거나 소속된 무리가 있어도 합법적인 곳이 아니었는데, <돼지의 왕>에서는 다른 배우들과 같이 장난치고 얘기도 나누게 됐다. 현장에서 이럴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웃음)
- <돼지의 왕>에서 범죄 사건을 추적하는 종석은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된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이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 사건의 경중은 다르겠지만 각자가 가진 약한 모습을 ‘돼지’라고 비유할 수 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혹은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거나, 신념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정종석은 점점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되는데,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더 나은 선택이 있을 텐데 왜 저렇게 행동할까라고 누군가는 궁금증을 가질 수 있겠지만, 과거 사건에 대해 경민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나가는 게 아닐까. 사실은 대본을 보면 볼수록 굉장히 어려워서 내가 무슨 용기로 이걸 한다고 했을까 생각했다. 종석이 꼭 이해를 구해야 하는 역할은 아닐 수 있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했을 때 경민과 종석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현시점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이야기다. 그 메시지가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