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돼지의 왕' 채정안, 준비된 배우
2022-03-16
글 : 김소미

스타성이 배우에게 장애물이 될 수 있다면, 채정안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무정>을 부르는 테크노 여전사에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전설적인 ‘구여친’으로 탈바꿈하고, 2000년대 트렌디 드라마에 ‘차도녀’라는 새 전형을 심기까지 채정안이라는 고유명사는 자주 아이콘으로만 풀이됐다. 그 매력은 지금도 여전해서 채정안은 이제 ‘채소’라 불리는 구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유튜브 채널 <채정안 TV>의 주인으로 뉴미디어 플랫폼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씨네21>이 배우 채정안을 다시 만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티빙의 첫 오리지널 시리즈이자 채정안의 첫 OTT 주연작인 <돼지의 왕>은 그런 의미에서 산뜻하다. 부스스한 중단발에 낡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강력 범죄 현장에서 안광을 빛내는 형사 강진아(채정안)는 모로 보아도 처음 만나는 채정안임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점은 그 모습이 파격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것. “형사를 연기하는 채정안이 보고 싶다”라는 제작사의 바람과 “그동안 장르물을 많이 해온 줄 알았다”라는 촬영감독의 인상평이 보여주는 괴리 역시 이런 감상과 궤를 함께한다. 두런두런 수다 떨듯 이어진 채정안과의 대화는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지금 그가 보여준 새로움이 얼마나 긴 시간 준비하고 바라온 결과인지를.

- 지난해 여름 드라마 <월간 집>에서 코믹한 캐릭터를 소화했고 이번엔 범죄 스릴러에 도전했다.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형사 역할은 처음이다.

= 배우로서의 욕심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월간 집> 무렵에는 코미디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마침 딱 맞는 캐릭터를 만나서 기분 좋게 도전할 수 있었다. 이번 <돼지의 왕>도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거다!’라는 감이 왔다. 범죄, 수사, 전쟁, 테러 등의 소재가 많은 미국 드라마를 보면 중심에서 활약하는 여성 전문가 캐릭터들이 많지 않나. 꼭 대단한 액션을 하지 않더라도, 직관이나 감각 면에서 남다른 예민함과 집요함을 갖추고 활약하는 유능한 여성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돼지의 왕>속 베테랑 형사 강진아를 만났으니 신날 수밖에. 개인적으로는 권총 액션에 대한 기대도 굉장했다. 한참 전부터 꼭 총을 들고 액션을 소화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막상 도전해보니 한 손으로 힘있게 방아쇠를 당기는 액션이 단순해보이지만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실감했다. 덕분에 촬영 초반엔 긴장도 좀 했다. (웃음)

- 진작 장르물에서 보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다. 장신에 특유의 날렵한 인상이 있고, 예능이나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보여주다시피 털털하고 인간적인 성격도 장르물과 잘 어울린다.

= 감독님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채정안이 가진 다양한 표정과 성향을 연기적으로도 표현할 기회가 더 많았어야 했는데 그동안 어떤 틀 안에서만 해석된 것 같다고. 2000년대 초반에 소위 화려한 ‘차도녀’ 캐릭터가 각광받을 때 자주 호출되었고, 그러다보니 이후 이미지가 그런 식으로 자리 잡았다. 완전히 다른 모습의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 열심히 놀아보고 솔직하게 내 성격도 드러내고, 지금처럼 개인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게 된 거다.

- 강진아는 애니메이션에는 없던, 티빙 시리즈의 오리지널 캐릭터다. 연기하는 배우가 직접 풀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을텐데.

= 김성규 배우가 연기한 형사 정종석의 선배라는 점에 주목했다. 내가 캐스팅되기 전에는 나이대가 더 어린 캐릭터였다고 한다. 흔히 장르물에서 남자주인공 옆에 있는 여성 캐릭터는 멜로적 감정을 교류하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내가 배역을 맡음으로써 확실히 종석보다 선배 형사라는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건과 관계의 본질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가져가려 했다. 무게감 있는 여성 형사를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오히려 자유로움으로 다가오더라. 여성성이나 매력을 어필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저 캐릭터에 심플하게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 무척 좋았다.

-캐릭터와 사적으로 접점을 느낀 지점도 있을까.

=자기 일이 아닌데 불의 앞에 흥분하는 모습이 솔직히 조금 닮았다. 그 탓에 어렸을 때부터 오지랖이 넓다는 소리를 듣거나 종종 오해를 받았던 것도 같다. 대본을 읽으면서 강진아의 소신과 내가 살아온 방식이 맞물리는 지점을 발견하고는 반가웠다.

- 연쇄살인에 얽힌 과거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강진아는 중립지대에 서 있다. 관객의 몰입을 돕고 이야기의 전개를 이끄는 일종의 해설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 진아는 자신이 신뢰했던 동료 종석의 비밀을 밝혀내는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종석을 대할 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무너지는 포인트가 있다고 해야 할까,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는 순간이 있다. 그 마음을 연기할 때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종석과의 개인적인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슬픔이 하나 있다면, 또 다른 슬픔은 과거에 일어난 비극에 대해 어른으로 느끼는 책임감 또는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본을 보면서도 많이 울었다. 당시에 폭력을 회피하거나 방관했던 어른들이 마냥 악인은 아니라는 것, 그저 미약한 개개인의 어른이었을 뿐이라는 점도 사회적 책임감에 대해 곱씹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 드라마나 예능에서 자주 들려준 똑 부러지고 톤 높은 목소리와는 꽤나 다른 발성을 보여준다. 낮아진 음역대, 말끝을 툭 던지고 흘려버리는 무심한 어투를 썼다.

= 대중적인 말하기에는 힘과 설득력이 필요하니까 기본적으로 경쾌한 하이톤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일찍 일을 시작해서 학습된, 내 안의 자본주의적 페르소나 같은 거지. (웃음) 그리고 옛날엔 현장에서 높고 예쁜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디렉션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번엔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대사를 하니까 내가 가진 원래의 소리가 더 자연스럽게 나온 게 아닐까 싶다.

-캐릭터의 외양을 잡아가는 데 의견을 보탠 부분이 있나. 셀러브리티로서 패션, 뷰티 분야에서 감각적인 재능도 보여주는 스타다.

= 강진아라는 예쁠수록 마이너가 될 캐릭터라는 걸 미리 잘 알고 들어갔다. 예를 들어 물광 피부? 절대 안된다. (웃음) 헤어 드라이도 해서는 안되는 캐릭터라고 봤다.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울수록 강진아라는 사람이 잘 보일거라고 생각했고, 처음에 의상팀에 제안하기로는 드라마 내내 강진아가 의상을 갈아입지 않고 단벌로 가면 어떨까했다. 결과적으로 옷이 바뀌긴 하는데그 옷이 그 옷 같을 거다. (웃음) 작품 조사하면서 듣기로는 요즘 현장을 뛰는 실제 형사분들을 보면 스타일이 꽤 멋지다고 하더라. 마냥 후줄근한 차람의 형사도 옛말이란다. 그래도 나는 그것과 별개로 강진아란 사람은 좀 더 험블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 가수 데뷔와 거의 동시에 영화, 드라마로 진출하며 배우 생활도 시작하면서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집약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느꼈을 법하다. 스스로 느끼기에 안정적안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고 느낀 시기는 언제였을까.

=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서 어느덧 엄청나게 성장해버린 동료들을 볼때 존경심을 느끼는 한편 자극도 받았다. 그리고 너무나 궁금했다. 다들 어떻게 저렇게 멋있어졌을까? 연기자로서의 자기 본질에 충실한 모습, 성실함, 그런 것들을 지켜보면서 그에 비해 나는 겉돌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위기감을 극복하기 시작한 건 현장의 재미를 실감하던 때부터였다. 20대 때는 솔직히, 현장이 무섭기도 했다. 현장 군기를 잡기 위해 신인에게 더 혹독하게 본보기를 삼는 분위기도 겪어봤다. 내 몫을 해내고 빨리 퇴근하기만을 바랐던 시기도 있었다면, <커피프린스 1호점>을 하면서 처음으로 같이 찍는 사람들과 재미를 주고받고 같이 성장하는 기쁨을 느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내게는 촬영장에서 얻는 활력이 이 일을 계속 하게 만드는 큰 동력 중 하나다. 이번 <돼지의 왕>은 내가 자주 ‘누나’라고 불리는 현장이었는데 (웃음) 그만큼 약간의 책임감도 들더라. 현장에 도착하면 배우와 스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그 날의 공기에 신경쓰면서 작업했다. 성격적으로도 원래 주변 사람들의 상태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 주변을 챙긴다는 게 큰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기도 한데.

= 원래 성격이 그런 줄 스스로 잘 알면서도 가끔은 피곤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는 불필요한 스위치를 끄는 연습도 한다.

- 드라마 <리갈하이>의 변호사, <슈츠>의 법률 비서, <돼지의 왕>의 형사 등 자기 커리어가 분명하고 스피커로서도 유능한 여성을 연기하면서부터 배우 본연의 매력도 시너지를 내고 있다. 연기가 좀더 즐거워졌나.

= 내가 가진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싶다고 결심하고, 그런 모습을 어필하기까지 혼자 웅크려 지내는 시간들도 분명 있었다. <돼지의 왕>을 작업하면서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구나. 그런 것치고는 빨리 적응하고 있구나’싶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갑자기 불쑥 찾아온 행운이라고는 생각 안 한다. 나 자신을 꾸준히 드러내고 표현해왔고, 작은 시도들이 쌓여서 전에 없던 기회도 만들어낸 거라고 믿는다. 옛날엔 자신이 없어서 내 한계를 섣불리 단정 짓기도 했는데, 요즘은 좀더 거침없이 해보자는 마음이 든다. 예감이 좋다.

- 어느덧 데뷔 27년 차다. 유튜브 채널 채정안TV를 보면 일상생활의 아기자기한 재미에 진심인 사람이란 인상을 받는다. 오랜 기간 일하면서 사생활에서 평정심을 지켜낸 방법이 아닐까 싶다.

= 친구들이 가끔 그런다. ‘넌 참 네 인생을 알아서 잘 산다’라고. 가수였고 지금은 배우인 채정안의 페르소나와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인간 장정안(본명)이고 스스로를 잘 돌보려 애쓴다. 부침을 겪으면서도 내 마음 속 한편에선 항상 이름을 따라(편안할 안妟) 안정된 삶을 꾸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일에 열성을 가지되, 욕심을 잘 조율해서 행복해지는 데에도 힘쓰고 싶다. 일은 무너지거나 고꾸라지지 않을 만큼만 열심히, 그리고 행복은 심플하게. 예를 들자면? 음... ‘이따 맛있는 거 뭐 먹지’하는 생각? 난 촬영 끝난 뒤에 휴식하는 법을 고민할 때도 진심이니까!

사진제공 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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