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더 배트맨'이 시리즈의 본질 위에서 얼굴에 집중한 까닭
2022-03-17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얼굴 없는 사람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슈퍼히어로가 있다. 마스크를 쓰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배트맨은 전자고 슈퍼맨은 후자다. 스파이더맨은 얼굴을 가리고 원더우먼은 안 가린다(대다수의 할리우드 여성 히어로에게 마스크가 없는 것은 초창기부터 그만큼의 입체적 서사가 부여되지 않아왔거나, 서사보다 외모가 중시돼온 탓이 크다. 이 글과는 별개의 논의가 필요하다). 엄밀히 하자면 이 구분법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지 여부를 기준 삼을 수 있다.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에게도 전투용 마스크가 있지만 대중은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 이런 영웅들은 자신의 행동이 낳은 결과를 두고 걱정이 많은 반면, 정체를 숨기는 히어로들은 말 그대로 정체성 고민에 밤잠을 설친다.

DC와 마블에서 정체성 고뇌를 선발 기준으로 대표 선수를 뽑는다면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이 각각 등판할 것이다. 두 캐릭터가 각 소속사에서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플레이어라는 점은 이들의 공통점과 무관하지 않다. 양쪽 모두 집안의 어른을 권총 강도에게 잃었다는 상실감, 그것이 자신 때문이었다는 죄책감, 그로 인한 복수심 등을 안고 산다. 이들은 그렇게 마스크를 쓴 채 마천루 위에 선다. 원체 영웅이란 외로운 법이지만 이 맥락에서 배트맨은 숱한 슈퍼히어로 가운데에서도 ‘얼굴 가린 고독한 영웅’의 총체다. <더 배트맨>이 기존 팬들의 환영을 받는다면 이와 같은 배트맨의 본질에 정면으로 다가선 다음 새로운 국면을 연 덕일 것이다.

차명 시대의 얼굴

프롤로그는 복면 쓴 괴한이 한 남자를 칼로 죽이는 순간을 누군가 훔쳐보는 장면이다. 알고 보니 고담시장과 어린 아들의 놀이였다. 당신은 언제든 속아넘어갈 수 있다. 전체를 보지 않고는 진실을 알 수 없다. 세상은 복잡하고 우리의 시야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이 <더 배트맨>을 가로지르는 화두다.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하면 배트맨(로버트 패틴슨)이 독백한다. “고담은 큰 도시여서 모든 걸 볼 수 없다.” 장소는 핼러윈 데이를 맞은 도심이다. 뭇 시민들이 가면을 썼다. 이들 마스크의 행렬을 코로나19 시대의 시각적 풍경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얼굴 아닌 이모티콘들이 홍수를 이룬 메타버스의 시대, 즉 익명 시대를 넘어 차명 시대에 당도한 인류의 제2의 얼굴들을 담은 스케치로 볼 수도 있겠다(만일 당신이 지인을 생각할 때 그의 얼굴보다 SNS 프로필 사진이 먼저 떠오른다면, 당신은 이미 메타버스의 차명 구간에 발을 들인 셈이다).

나아가 이 도입부는 정치·경제 양극화로부터 변이를 일으킨 혐오와 폭력의 바이러스가 엔데믹(토착병)화한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거리엔 마스크 쓴 강도들의 범행이 잇따르고 전철역에선 조커로 분장한 패거리들이 동양계 남성을 집단 폭행하려는 참이다. 영화 속 얘기일 뿐일까. 뉴욕 경찰청의 범죄 수배 트위터 계정(twitter.com/NYPDTips)에 들어가보자. <더 배트맨>의 거리를 방불케 하는 범죄 영상이 지난 2월 동안에만 65건이 올라왔다. 후드 점퍼에 마스크를 쓴 자들이 상점에 들어와 총을 들이대고, 전철역으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노인을 마구 때린다. 한 백인 남성은 코리아타운을 돌며 2시간 동안 동양계 여성 7명을 폭행했다. 뉴욕은 큰 도시여서 모든 걸 볼 수 없다. 우리는 CCTV에 포착된 것만 볼 뿐이다.

<더 배트맨>의 풍경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시사적이다. 이 영화의 고담시가 명백히 뉴욕을 배경 삼은 데는 깎아지른 마천루 때문만이 아니다. 맷 리브스 감독이 재현하려 했다는 1970년대 뉴욕은 연쇄 살인마가 준동하며 범죄의 도가니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주목할 점은 배트맨 2년차인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이, 악당의 스마트폰 라이브 방송에 실시간 댓글과 ‘좋아요’가 폭주하는 현재 시점이라는 사실이다. 이전의 빌런들이 지상파방송을 해킹해 범죄를 과시하면 펍에 모여 TV를 올려다보는 대중은 그저 두려워할 뿐이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방에 앉아 손쉽게 폭력에 동참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유튜브 댓글을 감염시키는 혐오와 폭력은 얼굴 없는 차명 프로필 뒤에 숨어 빠르게 번지며, 대개는 자신이 정의라는 확신에 빠져 있다. 그렇게 악당 리들러(폴 다노)는 쉽사리 추종자들을 규합해 테러에 나선다. 폭력 집단이 미 연방의회 의사당을 점거해 사람을 죽게 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뉴스가 여전히 생생하다.

“You complete me”

얼굴을 가린 리들러는 시장의 머리를 테이프로 감거나 검사 목에 폭탄을 둘러 날려버리는 등 살해 대상의 얼굴을 하나하나 없애버린다. ‘거짓을 행하는 자, 얼굴이 사라질지어다’라는 투다. 그의 다음 표적이 브루스 웨인이다. 이렇게 영화는 배트맨의 실존적 고뇌를 점층적으로 파고든다. 웨인에게 ‘배트맨 되기’(Being Batman)에 대한 고민이 여전하던 2년차라는 시점은 그래서 중요했다. 토니 스타크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의 그 모든 일들의 끝에서 “나는 아이언맨이다”(I am Iron Man)라며 손가락을 튕길 때, 당신이 어떤 완결성을 느꼈다면 be동사의 존재론적 의미는 충분히 체득한 셈이다. 배트맨이 “나는 배트맨이다”가 아닌 “나는 복수다”(I am vengeance)라고 말할 때 복수심에 사로잡힌 불완전한 자아를 느낀 것처럼 말이다.

존재론에 바탕을 둔 현상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과 얼굴을 마주할 때 비로소 ‘내가 된다’(I am).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저 몸뚱이일 뿐이다. 우리는 얼굴들을 마주하는 시각 경험 속에서만 나의 존재를 파악하고 행동반경을 정한다.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배트맨은 온전한 존재로 완성되지 못한 채 어둠을 떠돈다. <배트맨> 시리즈의 얼굴 없는 얼굴들(조커, 레드후드, 투페이스, 스케어크로우 등)은 그런 의미에서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주인공의 결핍과 동전의 양면이 되어 만나는 것이 배트맨 유니버스의 골조다.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는 배트맨을 마주보며 이렇게 내뱉는다. “네가 나를 완성시키는 거야.”(You complete me)

의심하는 영웅과 확신하는 악당

종종 극단적으로 배경이 흐려지며 얕디얕은 심도로 인물의 얼굴을 잡은 화면들은, 정체성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브루스 웨인의 심경인 동시에 사태의 실체를 온전히 볼 수 없는 자의 혼돈스러운 시선이다. 그의 콘택트렌즈는 눈으로 본 모든 장면을 녹화할 수 있고 실시간 송신도 가능하지만, 결함투성이인 우리의 인식능력은 첨단 장비로도 채워지지 못하고 진실은 줄곧 저 멀리에 있다. 이렇게 배트맨이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이 팔코네(존 터투로)나 리들러 같은 악당들은 파편적인 단서만으로 전체를 본 것인 양 사태를 단정 지은 다음 악행을 일삼는다. 빌런이 상대적으로 약체였다는 불만을 무릅쓰고 배트맨의 정체성 고뇌를 다루는 데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한 이번 트릴로지 1편은, 그렇게 심사숙고하는 영웅과 확신에 찬 빌런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배트맨> 시리즈의 본질에 바짝 다가선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타인을 함부로 판단해 혐오하면서도 스스로 정의롭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더 배트맨>이 말하는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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