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느리되 묵직하지 못한 '더 배트맨'의 한계에 대해
2022-03-17
글 : 송경원
충분한 깊이에 다다랐을까

어둡고 느리고 무겁고 깊다. <더 배트맨>이 택한 노선을 두고 대체로 비슷한 말들이 오간다. 이미 켜켜이 쌓인 배트맨‘들’의 길을 답습하지 않을 한 줄기 실낱같은(어쩌면 거의 유일한) 경로를 찾아낸 맷 리브스 감독의 야심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더 배트맨>은 배트맨 본질에 대한 성찰을 성실히 수행한다. 탐정 누아르물에 기반한 장엄한 분위기가 매혹적인 <더 배트맨>은 배트맨 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수작이다. 그걸 부인할 생각은 없다. 다만 3부작까지 나온다고 하니 한두 가지 아쉬운 점에 대해 칭얼거려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맷 리브스 감독은 어둠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배트맨의 심리를 확장한 것마냥 그림자의 안팎에서 배트맨의 궤적을 응시한다. 하지만 톤과 속도가 반드시 무게와 깊이를 보장하냐 묻는다면, 그렇진 않다. 우리는 종종 스타일과 효과, 의도와 결과를 동일시하는 착시에 빠진다. 어둡고 느린 건 스타일의 방향성이다. <더 배트맨>은 화면의 무드가 인물의 심리로 확장될 수 있도록 오래 지켜본다. 대체로 바라보는 시간은 곧 묵직한 체감의 영역으로 번져나가기 마련이지만 <더 배트맨> 앞에선 살짝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겁고 깊은 건 스타일의 결과물이다. 이 영화는 충분히 어둡고 느리지만 그렇게 무겁지도, 깊지도 않다.

맷 리브스가 분위기를 구축하는 장면들 자체는 인상적이다. 다만 무엇을 오래 응시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다소 쉬운, 혹은 빤한 길을 고른다. 이 글에서는 딱 두 장면만 놓고 의도와 결과의 괴리를 좀더 벌려볼까 한다. <더 배트맨>이 스스로 얄팍해지고 있다고 느낀 첫 번째 순간은 브루스 웨인이 자신의 방바닥에 거대한 생각의 트리를 그리는 장면이다. 리들러에게 농락당하던 브루스는 그간의 증거를 모아놓고 페인트 래커로 조감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분노에 휩싸여 추리를 펼치는 이 장면은 멋지지만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용도 없다. 그저 탐정 배트맨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만 전할 뿐이다. 심지어 배트맨의 추리들은 다 실패한다. 물론 이건 의도된 실패다. 본래 하드보일드 누아르물의 형사는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라기보다는 관찰자에 가깝고, 배트맨이 2년차 풋내기 히어로라는 점에서 납득할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이건 그럴듯한 장면만이 남은, 영화가 무드와 뉘앙스 위에서 공회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스타일을 위한 스타일. 배트맨이 무언가 무게를 짊어지고 있고,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은 3시간 내내 반복된다.

문제는 분위기 구축에 충분히 공을 들이는 장면들에 비해 서사가 의외로 단선적이란 점이다. <더 배트맨>은 탐정 배트맨이 리들러의 안내를 받아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 게임에서 배트맨은 철저히 당하는 입장이고 그 끝에서 마주하는 건 각자의 정의와 진실이 존재한다는 식상한 명제다. 고담시의 부정과 연결된 수많은 커넥션 앞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중요한 건 진실의 탐문과 발견이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당신을 증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배트맨은 사실 자유의지가 박탈당한 히어로다. <더 배트맨>의 서사는 배트맨의 실존적 선택에 대해 사유하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처음부터 목적지가 정해진 외길이다.

<더 배트맨>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을 거의 반복한다. 차이가 있다면 2년차 배트맨의 미숙함이 그를 좀더 친근하고 현실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렸다는 점, 그리고 3부작의 경로를 1편에 압축했다는 것 정도다. 배트맨의 영원한 테마는 공포와 폭력이다. 배트맨 서사의 원형은 “공포는 도구”라는 명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파생되고, 이는 정해진 경로를 크게 벗어나기 힘들다. 공포를 통해 시스템의 문제를 개선한다는 전략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수반한다. 공포와 폭력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선명하다. 이 매혹적인 권능은 주변에 영향을 준다. <다크 나이트>를 예로 들면 하비 덴트와 조커는 모두 배트맨의 정의가 아니라 실행‘방식’에 매료된다. 하비 덴트는 복수에 심취하여 타락하고, 조커는 목적 없는 폭력 그 자체를 대변한다. 어쩌면 배트맨 서사 속 모든 빌런들은 배트맨이 가지 못했거나 가지 않았던 미래(혹은 멀티버스)들이다. 다만 배트맨은 히어로라는 족쇄에 묶여 있다. 따라서 공포 전략은 반드시 실패하고, 아픔을 겪은 후 수정되어야 한다.

분노와 상실감이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존재를 빌런과 구분 짓는 유일한 미덕은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이고 수정하는 태도다. 요컨대 빌런은 결론이고 배트맨은 과정(이자 가능성)이다. 어둠에 잠겨 빛을 갈구하되 폭력과 공포의 권능에 취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 공포를 억제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상대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어야 하고 둘째, 공포를 도구 삼아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에겐 둘 다 없다. 아직 폭력을 수단으로 활용할 단계에 접어들지 못한 그는 스스로를 ‘복수’라고 소개한다. 이 대사는 후반부 리들러의 추종자들에게 메아리가 되어 고스란히 돌아온다. 폭력을 도구 삼았던 방식의 오류를 깨닫고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열린 태도야말로 히어로 배트맨의 능력이다. 도망치지 않는 굳건함과 자기 희생은 그에게 희망의 등불을 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그렇게 <더 배트맨>은 놀란의 배트맨처럼 정해진 운명의 감옥에 갇혔다. 공포를 주는 존재에서 희망을 주는 존재로의 전환은 배트맨이 히어로로서 성립하기 위한 당위의 영역이다. 경로가 다를 수 있어도 목적지가 수정될 일은 없다. 균열은 여기서부터다. 정해진 결말은 재미가 없는 법이다. 배트맨이 어떤 선택을 할지가 빤한데 배트맨이 왜 변해야 하는지 아무리 조리 있게 설득해봐야 심드렁해진다. 이때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쪽으로 끝까지 가버린 빌런들의 매력에 집중하는 것. <다크 나이트>가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와 투 페이스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른 하나는 배트맨을 충분히 오래 괴롭히는 거다. 오랫동안 좌절하고 시달린 후에 배트맨은 공포를 뿌리는 존재에서 자기 안의 두려움을 응시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여기야말로 ‘시간’이 필요하다. <더 배트맨>의 한계는 완급 조절에 무관심하다는 거다. 놀란이 3부작에 걸쳐 수행했던 명제를 3시간 안에 끝내고자 맷 리브스는 어느 순간을 길게 보여주고 어느 순간을 빠르게 압축할지 결정하지 못한다. 그저 전체를 느리고 어둡게 응시할 따름이다. 긴 호흡과 응시를 통해 쌓아올린 뉘앙스를 걷어내고 나면 정작 서사는 대체로 단조롭고 때때로 조급하기까지 하다.

본래 속도란 상대적이다. 빠른 구간이 있어야 느린 것이 체감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건대 속도는 무게다. <더 배트맨>은 장면에 무게를 부여하는 속도가 부재한다. 그리하여 어떤 장면이 가장 깊게 각인되는가. 빌런인 펭귄은 서사적으론 하등 인상적이지 않지만 펭귄과 배트맨의 카 체이싱은 서사의 무게와 달리 이 영화에서 가장 묵직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나는 <더 배트맨>의 영화적 진실과 깊이를 카 체이싱 장면의 존재감, 강철과 어둠과 불꽃의 육체에서 발견한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 의도와 효과가 어긋나는 몇몇 순간들은 어둡고 느리지만 동시에 가볍고 조금은 얄팍한, <더 배트맨>의 현주소를 정확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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