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다이애나와 할리우드의 크리스틴. <스펜서> 속 둘의 만남이 명예의 횡포에 짓눌리는 여성의 위기를 적절히 대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감각적 세계는 현실을 냉철히 묘사하기보다 심리와 신체의 조건에 주목한다. 가빠지는 호흡과 뒤틀리는 내장을 붙잡고 구역질을 거듭하는 동안, <스펜서>는 토해낸 오물 속에서도 기어코 아름다운 조각을 샅샅이 골라내는 영화다. 사흘의 왕실 크리스마스 휴가 중 다이애나 스펜서는 “다 식어버린 죽처럼 차갑게 흘러내리는 왕실 사람들”(<가디언>)을 뒤로하고, 오로지 자기 응시에의 격정에 사로잡혀 있다. 시선을 점유한 다이애나가 그려낸 주관적 세계는 내내 장면의 기운을 충동적이고 연약하게 만들어, 좀처럼 귀족의 실존적 구토를 냉소할 틈을 내주지 않는다. 과잉된 감정까지도 샤넬 오트 쿠튀르 드레스 자락처럼 우아게 휘감고서, <스펜서>는 파토스를 훌륭하게 집약해내는 완결의 기술 역시 발휘한다.
낙오병이여, 무엇이 슬픈가
“다이애나 병사, 무엇이 슬픈지 말하라.” 늦은 밤, 촛불 앞에 둘러앉은 다이애나와 윌리엄·해리 모자는 ‘소령과 병사’ 게임에 빠져 있다. 병사를 맡은 사람이 소령을 맡은 사람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하는, 일종의 진실게임이다. 엄마의 심리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는 장남 윌리엄의 질문에 다이애나는 “과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단 3일뿐인 스크린 타임 속에서 다이애나를 붙드는 복잡한 과거를 설명하기란 요령부득일 터, <스펜서>는 다이애나의 중요한 과거를 두개의 층위로 나눈 다음 각각 간단한 소품을 통해 암시한다. 첫 번째는 찰스 왕세자와의 불화다. 영화의 배경인 1991년 겨울,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파커 볼스의 불륜이 점점 더 공공연한 형태로 변모한 상황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고 알려져 있다. 갓 20살을 넘긴 나이에 12살 많은 찰스 왕세자와 결혼한 후 두 아들을 낳으며 약 10년의 시간을 버텨낸 후였다. 결혼 초기부터 태연하게 커밀라 파커 볼스와의 만남을 지속해온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커밀라 두 사람에게 똑같은 진주목걸이를 선물하는 만행도 저지른다. <스펜서>에서 남편이 준 진주목걸이를 억지로 착용한 다이애나는 목이 조여오는 질식감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반쯤 가버린” 여자라고 지칭하기에 이른다. 한편 샌드링엄 영지는 다이애나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이며 생가 파크하우스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샌드링엄을 찾은 그는 아버지의 코트를 입은 채 버려져 있는 허수아비와 을씨년스럽게 방치된 파크하우스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영화 초반, <스펜서>가 묘사하는 왕가의 크리스마스이브는 전쟁 발발 직전을 연상케 하는 긴장과 불길함이 감돈다. 해안가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별장은 흐릿한 형체만 간신히 드러내며, 얼어죽은 꿩이 방치된 한적한 교외 도로를 따라 식재료를 가득 실은 군용 트럭이 줄지어 이동하는 풍경은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대열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왕실 요리사들을 향해 주방장 대런이 ‘제군들’이라 칭하는 풍경도 어색할 게 없다. 분초를 다투는 일정과 폐쇄적 규율로 점철된 왕실 휴가 속에서 다이애나 병사에게 하달된 명령은 두 가지다. 정시에, 정해진 옷을 입고, 제자리에 도착할 것. 그리고 제군들이 정성 들여 요리한 음식을 토하지 않는 예의를 갖출 것. 수행원까지 따돌리고 홀로 먼 길을 운전해왔건만 무언의 압박과 시선에 포박된 다이애나는 철저히 무력해진다. 과연 그녀는 자기 힘으로 이곳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별장을 배회하며 토하고 피흘리고 주저앉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몸짓은 흡사 혼자 대열에서 이탈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전장의 낙오병처럼 절박해 보인다.
크리스마스 호러와 앤 불린의 유령
수도꼭지가 기이한 쇳소리를 내고 별장 복도는 광각으로 왜곡돼 인물을 집어삼킨다. 호러와 심리극에 어울리는 감각을 동원하는 <스펜서>에서 샌드링엄 별장은 그곳이 지나온 시간의 무게만큼 다이애나를 짓누른다. 이를테면 다이애나는 오래전 빅토리아 여왕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자신의 방을 둘러보며 “이곳의 먼지에는 분명 그녀가 남긴 각질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구태여 괴로운 자각을 거듭하는 유의 인간이다. 공기 중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세포를 감지해내는 그의 초현실적 지각력은 곧이어 ‘앤 불린의 유령’마저 불러낸다.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즉위 천일 만에 단두대에서 처형돼 ‘천일의 앤’이라는 수식어로도 유명한 앤 불린과 다이애나 스펜서는 닮은 데가 있다. 스펜서 가문과 앤 불린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대목도 있지만, 혈통을 따지지 않더라도 불운한 결혼 생활을 지속한 앤 불린에게 다이애나는 이미 축축한 유대감을 느낀다.
종반부에 이르면 다이애나가 극심한 자기 파괴의 충동을 이겨내는 구원의 순간에 또다시 앤 불린이 등장한다. 이때, <스펜서>에서 단 한번 피어나는 몽타주 신은 영화 전체의 리듬을 재편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녀 자신이 자부하는 대로 남들보다 느리고 자주 지각하며, 왕실 행사에 마지못해 존재하던 창백한 신체가 처음으로 춤추고, 뛰고, 활보하는 장면들이 흘러나온다.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시간을 단숨에 관통하듯, 아껴둔 몸짓들이 한번에 방출되고 나면 앤 불린의 유령은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령이 다이애나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다이애나 자신이 유령을 필요로 했으며 통제했다는 사실이다. 유령의 형상을 빌려 내면의 발화점에 점점 다가갔던 다이애나가 마침내 자신을 폭발시키고 나면 앤 불린도 필요성을 잃는다. 요컨대 <스펜서>의 다이애나는 자신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연약해진 인간이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을 만큼만 휘청인다. 이 고고한 정체성은 음악과 화면을 통해서도 영화 내내 거듭 서술된다. 음악감독 조니 그린우드는 고전적인 바로크 선율 위로 재즈를 겹쳐놓으며 궁정 사람들에게 동화되지 않는 다이애나만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필름 촬영을 택한 촬영감독 클레르 마통은 콘트라스트를 과감히 낮추고 안개 속의 수채화처럼 먹먹한 느낌으로 풍경을 묘사하는 가운데, 앤 불린이 불러낸 몽타주가 끝난 직후 궁정 드레서 매기(샐리 호킨스)와 재회한 장면에서만 선명한 햇볕을 화면 가득 허락해 생명력의 복원을 강조했다. 영화 내내 내려앉아 있던 추위와 죽음의 기운을 물리치려는 듯, 춤추고 달리며 움직이는 몸짓들로 채워진 <스펜서>의 종반부는 심리극의 전형성을 돌파하는 섬세한 연출의 중요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각본가 스티븐 나이트는 <스펜서>를 “전기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에서 단 며칠 만을 떼어낸 스냅사진”이라 말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펜서>의 말미는 다이애나 스펜서를 구성하는 수만점의 슬라이드 필름이 환등기 위에서 휘황하게 달음박질치는 순간이라 하겠다.
스펜서 백작의 코트
1961년 7월, 스펜서 백작 7세의 셋째 딸로 태어난 다이애나 스펜서는 가문을 이어갈 인물이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상심한 부모의 실망감을 일찌감치 배우며 자라났고 7살 때는 부모의 이혼을 지켜봤다. 20살에 찰스 왕세자를 만나기 이전의 다이애나 스펜서에 관해 주변인들이 말수가 적고 배려심이 깊으며 소극적인 성격으로 기억하는 이유도 그가 실제로 다소 침체된 마음으로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스펜서>에서 다이애나는 버려진 허수아비가 걸치고 있는 코트가 자기 아버지의 옷임을 알아채고 궁정 드레서 매기에게 수선을 요청한다. 성탄 미사에 입는 붉은 재킷을 비롯해 다이애나 스펜서의 시그니처 컬러를 붉은색으로 묘사하는 영화가 아버지의 코트 또한 그린, 네이비 같은 바버 코트의 익숙한 색이 아닌 다홍색으로 설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옷의 탈착에 유독 민감한 탈피와 변신의 서사이기도 한 <스펜서>에서 다이애나는 자기 몸에 맞게 수선한 아버지의 코트를 갖춰 입고 왕가에 대적하기 위해 사냥터를 찾는다. 파블로 라라인에 의하면 <스펜서>와 <재키>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이 남편과 연결되지 않은 채로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굳혀가는 서사”다. 남편을 딛고, 아버지의 유산도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소화한 여자의 이야기인 <스펜서>를 더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기 구출의 서사’라고도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찰스 왕세자가 커밀라 파커 볼스에게 선물한 것과 똑같은 진주목걸이를 뜯어버리고, 경쾌한 길이로 수선한 스펜서 가문의 코트를 걸친 다이애나는 영화의 시작점에서 그랬듯 직접 운전대를 잡고 도시로 되돌아간다. 이후 5년이 흐른 1996년, 영화 바깥에서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와의 이혼에 성공했다. 이혼 후 1년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도디 알파예드와 연애하며 자유를 만끽하던 다이애나 스펜서는 1997년 8월30일 프랑스 파리 시내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도디 알파예드와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파파라치 세례를 피하기 위해 과속하던 차가 지하차도에서 기둥을 들이받은 사고였다. 부서진 차의 뒷문에서 쓰러져 내린 다이애나 스펜서를 향해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심하고 잔인한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