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패러렐 마더스>를 통해 돌아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의 역사 그리고 페넬로페 크루스
2022-04-01
글 : 김소미
용맹한 여자들의 신세계
<패러렐 마더스>

<패러렐 마더스>에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친애하는, 남편 없는 여자들, 폭력과 강간으로부터 살아남은 여자들,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이 또다시 나온다. 그들은 이번에도 천연덕스럽게 용맹한 얼굴로 경계 없는 유대가 빚어내는 삶의 확장을 보여주며, 이는 곧 감독의 전작 <하이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 <줄리에타>를 돌아보게 만든다. 동시에 <패러렐 마더스>는 <나쁜 교육> <나쁜 버릇>이 시도했던 ‘역사기억법’의 일환으로 프랑코 군사정권이 남긴 상흔도 집요히 되새긴다. <페인 앤 글로리>에서 동굴처럼 설계된 유년의 뜰로 되돌아갔던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다음 행선지로 정한 곳은 더 깊고 어두운 자궁 속, 그리고 무덤 속이다. 요동치는 색채와 펑크적 감각이 한결 가라앉은 자리에 더욱 진해진 이 감흥은 도대체 무엇일까. <패러렐 마더스>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의 전통을 되짚으며 그 대답을 찾으려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멈춰 선 곳 중에는 7번째 공동 작업을 마친 페넬로페 크루스라는 진귀한 화신에 대한 감탄의 제단도 있다.

<하이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
<줄리에타>

학살과 강간의 역사에 부치는 멜로드라마

“내 할머니와 엄마가 그랬듯, 우리 집안의 전통에 따라 나도 아이를 혼자 키울 거야.” 가정이 있는 인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와 사랑에 빠진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스)는 곧 임신까지 하게 되는데, 아직은 이혼할 수 없다며 아이를 지우길 원하는 아르투로에게 실망한 뒤 오히려 남자를 내쫓는다. 그녀에겐 두 가지 열정이 있다. 혼외자인 뱃속의 아이를 지키고 키우는 한편, 마을 외곽의 집단 무덤에 묻힌 증조부의 유해를 발굴해 다시 잘 묻어주는 것이다. <패러렐 마더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강인한 여자들, 그리고 “더이상 길거리에서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풍경을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인디펜던트>) 마드리드의 자유가 딛고 선 땅을 다시 살핀다. 70대에 접어든 초로의 거장은 길고 긴 해방의 축제를 끝내고, 22번째 영화 <패러렐 마더스>에서 제의를 시작한다.

<패러렐 마더스>의 도입부가 보여주는 신의 연결은 기묘하다. (1)사진작가 야니스가 법의학 인류학자인 아르투로의 초상화를 찍어준다. (2)아르투로에게 고향 외곽에 묻혀 있는 증조부의 유해 발굴 작업을 의뢰한 야니스는 그를 집에 초대해 죽은 자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3)얼마 후 둘은 마드리드에서 재회해 사랑을 나눈다. (4)만삭의 야니스가 출산의 고통에 신음한다. (5)10대 미혼모 아나가 등장해 야니스와 한날한시에 아기를 낳는다.

죽음과 학살, 시신의 그림자 위로 연인의 로맨스와 육체적 정열이 포개지고 섹스 신 직후에 시치미 뚝 떼고 출산 신을 붙이는 쾌속의 전개다. 야니스가 아르투로에게 소개하는 처형된 선조들의 초상화가 슬프게도 평온한 데 반해, 이어지는 야니스의 클로즈업은 출산의 고통으로 격하게 일그러져 피와 체액, 비명을 뿜는다. 이때 마침 야니스의 옆에서 산통을 겪던 어린 여성 아나(밀레나 스밋)는 몇 장면이 지난 뒤 어느새 야니스의 연인이 되어 한 침대에서 뒹군다. 여기까지만해도 과연 ‘알모드라마’(Almodrama)다운 서사이지만, 갈등은 서로의 아기가 병원에서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부터 그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뒤따르는 사건들이란, 이 방면에서 매우 독자적인 통속 멜로드라마의 계보를 갖고 있는 한국 관객이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유추할 만한 것들이다. 피어오르는 의심, 비밀스럽게 벌어지는 친자 확인 과정, 눈물의 고백과 충격의 포효…. 총천연색의 감정이 모던한 가구의 모양새를 하고 알모도바르의 집 안을 물들일 때, <패러렐 마더스>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실없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도대체 이 지독한 알모드라마를 TV 일일 연속극의 막장 서사와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착한 주인공이 보상받는(결과적으로는 경쟁에서 승리하고 쟁취하는) 생존과 권선징악의 멜로드라마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세계 위에서 표면만 유지된 채 전혀 다른 행로를 걷는다. 이 막돼먹고 복잡한 관계도는 인물들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차별과 폭력의 역사를 곧장 가리킨다. 병원의 실수로 아기가 뒤바뀌었지만, 두 엄마는 왜 자기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바로 그 공백과 무지, 박탈의 영역에서 여자들은 모두 연결돼 있다. 파시스트들이 죽인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야니스에게는 삶의 공백으로 작동해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아기도 부계와 연결되어 있으리라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집단 강간의 피해자로 10대 미혼모가 된 아나의 경우, 아기 아버지가 누군지 특정할 수 없어 의심조차 할 수 없게 한다. 멜로드라마 서사 양식의 극적 과장은 <패러렐 마더스>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역사의 반영이며, 야니스는 잊힌 죽음들을 바로 세우면서 자기 삶에 주어진 복잡한 사랑의 형태 역시 완성해나가야만 한다.

무덤과 자궁 위에서

<하이힐>(1991)에서 15년간 단절 상태였던 모녀 관계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삼각관계로 변형되고 그 남자의 죽음으로 다시 연결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엄마는, 20년 전 자신의 연인이었으나 지금은 트랜스젠더가 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어느 젊은 수녀와 돈독해진다. 그리고 에이즈로 수녀가 죽은 후 남겨진 아이를 기르는 것으로 자기 삶을 다시 일으킨다. <귀향>은 유령까지 동원해 남편과 아버지의 폭력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의 서사를 3대에 걸친 역사적 굴레로 서술한다. <줄리에타>에서 12년 전 사라졌다가 돌연 엄마에게 편지를 보내온 딸은, 자기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지어준 아들이 죽은 뒤 엄마와 재회의 뜻을 내비친다.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유대의 뒤편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고 <패러렐 마더스>에 이르러 그 죽음은 사회적 기억의 차원에서 확장된다. 그리고 작가의 이런 진전의 뒤편에는 현재 스페인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슈인 ‘민주주의 기억법’이 있다.

1936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39년 동안 국가를 지배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시대의 서막인 스페인 내전기(1936~39), 파시스트들에 의해 약 11만5천명의 시민들이 엉뚱하게 끌려가 집단 처형을 당했다. 야스밀라 주바니치 감독의 <쿠오바디스, 아이다>가 먼저 짚었듯 그날 끌려간 남자들의 기억을 구술하는 존재는 <패러렐 마더스>에서도 대개 여성들이다. 마을마다 증발된 남편과 아버지를 기억하는 여자들이 야니스의 엄마와 할머니처럼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2013년 역사기억법이 국회에서 한 차례 통과된 이후 2021년 민주주의 기억법이 재차 발행된 현재, 스페인 정부는 법률 제정을 통해 희생자와 망명자를 기리는 이틀의 추모일을 마련하고 희생자 공식 등록부를 준비 중이다.

그래서 정치적 무관심이 곧 대담한 정치성이었던 ‘라 모비다’의 시대를 지나,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요즘 어느 때보다 역사적인 발언에 힘을 쏟는다. “프랑코 정권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우는 것이 내가 그에게 복수하는 방식이었지만, 그렇다고 잊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 공동묘지에 너무 오래 방치되었던 유골들은 더이상 식별조차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다.”(<가디언>)

과거로부터의 행진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 알모도바르는 잘 익은 과실을 움켜쥐듯 백골에서도 생생한 체액과 피를 짜낸다. 비극에서도 풍요로운 생명력을 낚아채 기꺼이 낙관주의자의 춤을 춘다. 과거와 미래,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절묘한 평행 감각으로 살아낸 여자들이 조용히 행진하는 마지막 장면은 비장하기보다는 차라리 기쁨의 공기로 물들어 있다.

뿌리를 되찾으려는 여자가 인류학자와 만나 아기를 낳고, 병원에서 아기가 뒤바뀐 두 엄마가 서로 사랑에 빠지고, 수십년간 땅 밑에 뒤엉켜 있던 학살 피해자의 유골이 끌어올려지는 순간 강간 피해자는 그제야 눈물을 흘린다. 태어난 아이는 그들 모두가 함께 키울 것이다.

이토록 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패러렐 마더스>는 진실이라고 믿게 만든다. 집단 무덤을 향해 마을 여성들이 행진할 때,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갓난아이를 안고 홀로 기차를 탄 엠마누엘(세실리아 로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간을 쏜살같이 관통해 미래로 향하는 것 같았던 엠마누엘이 20년 후 <패러렐 마더스>에서는 더 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과거를 돌보러 돌아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가 들숨과 날숨처럼 평행하는 <패러렐 마더스>는 엔딩에 이르러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포개지는 환상마저 잠시 허락한다. 삶과 영화, 아득한 역사를 점점 더 대담히 겹쳐놓기 시작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시도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감지하는 능력을 본다. 그것이 지속되는 한 평행한 동행을 원하는 관객이 스크린 너머에 아주 많다는 사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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