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줄 알았다. 분명 ‘영화란 무엇인가’에 해당하는 다섯 작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건만 인터뷰 전날 이준혁으로부터 열 작품이 도착했다. 두배에 달하는 목록을 보고 참 그답다 싶었다. 많이 알려진 대로 배우 이준혁은 영화 보기를 사랑한다. 지난 몇년간 이준혁의 시네필리아를 지켜보면 이따금 그가 영화를 사랑하다 못해 두팔 걷어붙이고 영화 사이에서 중매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는 어제 본 영화가 좋았으면 어떻게든 남에게 소개하려 하고, 꼭 만나보라는 투로 이 영화의 장점을 곁들인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영화를 엮어내며 영화끼리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어질 대화도 마찬가지다. <가타카>와 <아노라>, 니콜 키드먼과 마동석은 어떻게 어울릴까. 전혀 다른 작품, 배우도 영화에 대한 이준혁의 순정이면 절로 궁합이 점지된다.
-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만 해보자.각 잡고 이야기하려니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의 목록은 직감으로 떠올렸다. 예전엔 인생 영화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영화들도 있어서.
- 인생 영화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지 않나. 영화 한편이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까.
정확히 그 이유로 인생 영화를 꼽기 어렵다. 감상 당시 내가 겪은 일과 유사한 이야기가 우연처럼 펼쳐져 영화에 감화될 수도 있지만, 삶의 단면과 무관한 영화도 나의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도 있다. 오늘은 근래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영화를 가져왔다.
나를 지키기 - <가타카> <아노라> <컨택트>
- <가타카>에 관한 애정을 종종 피력해왔다.처음엔 우생학을 근거로 사회에서 소외되는 빈센트(에단 호크)가 어떻게든 체제 내에 편입되려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빈센트가 샤워하면서 자신의 각질을 벗기는 장면 있지 않나. 막 배우가 됐을 무렵 산업 시스템과 나를 치열하게 맞춰가던 때 이 장면이 그렇게 가슴에 남더라. 결국 원하는 바를 이뤄낸 빈센트에게 박수를 보냈고. 그런데 요즘은 빈센트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 맞는지 고민이 된다. 빈센트는 온전한 자신이 아닌 제롬(주드 로)의 신분으로 우주로 향했고, 지구로 복귀한 이후 빈센트의 삶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를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를 바꿔나간다. 그렇게 나를 바꾸어 체제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후엔 나를 둘러싼 사회 전반이 빠르게 변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서 있는 위치에서 매번 무얼 고민해야 하는 걸까. 지금 내린 결론은 나를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아노라>를 볼 때 <가타카>를 생각했다.
- 두 영화가 어떻게 닿아 있나.<가타카>를 처음 볼 때만 해도 나를 지워서라도 꿈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보다 좋고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애니(마이키 매디슨)는 결국 ‘아노라’로 영화 끝에 남는다. 직업 전선에서 자기를 투신하고, 반야(마르크 예이델시테인)와의 만남을 통해 값져 보이는 체제 안에 들어가려 전력투구하다가도 결국 끝에 이르러서는 나를 수호하는 일이 가장 가치롭다는 걸 인정한다.
- <아노라>가 결말에서 자기를 지켰다고 보나. 워낙 해석이 분분한 결말인데.
애니는 자기 위에 덧씌운 수많은 껍데기를 제거한 후 오롯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고르(유리 보리소프)의 시선을 경험한다. 그때 애니가 스스로를 지켜냈을 것이라고 본다. 많이들 내 이름 앞의 직업인 연기자를 먼저 보고, 나 역시 직업의 특수성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나를 배우 이준혁이 아닌 인간 이준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만난 적 있는지, 나도 온전한 이준혁으로 누군가의 앞에 선 적이 있는지 영화를 본 후 돌이켜봤다.
- <가타카>에 두 차례 등장하는 빈센트와 안톤(로렌 딘)의 수영 대결은 어떻게 기억하나.
내가 연기하는 모든 작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질주한다. 빈센트처럼 늘 숨이 차도록 달리고 헤엄치려고 노력한다. 애니도 숨 가쁘게 달리는 친구다. 빈센트가 트레드밀 위에서 죽도록 뛰다 숨을 몰아쉬는 장면이나, 애니가 복잡한 날을 보내고 전철에서 기진한 표정을 보일 때 여러 상념이 든다. 만약 누군가가 <가타카>가 인생 최고의 영화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고된 시간을 버티는 힘을 선사한 영화임은 확실하다. 그렇게 영화가 나에게 질문을 남긴다. 다음엔 무엇이 있지? 시스템과 구조 바깥의 네겐 무엇이 남지? 나는 어느새 빈센트보다 나이도 많고 우주선 가까이에도 언젠가는 도달할 텐데, 그 너머까지 향하려면 결국 <아노라>처럼 나를 직면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노라>는 <가타카>로 치면 우주선 탑승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 골라준 <컨택트>를 이야기에 오버랩해보면 SF영화의 기조에 관해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상과학 속 단일 주인공은 늘 선택의 주체고, 기실 그 선택은 취사보다는 감당에 가깝다. <컨택트> 속 루이스(에이미 애덤스)의 마지막 결단이 대표적이다.
우린 모두 삶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산다는 건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컨택트>는 살면서 내린 수많은 선택이 만들어내는 확률까지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로로 다가오는 영화다. 경로 이탈의 순간에 다시 돌아갈지언정 그 길에서 얻는 것만은 분명하다. 루이스는 끝을 알고도 고결한 길을 걷는데, 그게 비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길 위에서 얻는 수많은 경험과 그 안에서 파생되는 무수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 내리는 결정이 사무쳐 볼 때마다 운다. 선택하고 선택받는 직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 드니 빌뇌브는 어떤 감독인가. <컨택트> 이후로 확실히 할리우드의 스페이스오페라를 책임지는 이름이 됐다.
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컨택트>에서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우하는 첫 순간처럼,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동안만큼은 나를 다른 세상으로 실어 나른다는 감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이름이다. <듄>의 샤이 훌루드 구현은 말하기에도 입 아프다 .
선을 넘는 사랑 - <콜드 워> <챌린저스> <팬텀 스레드>
- <콜드 워>와 <팬텀 스레드>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챌린저스>는 조금 의외다.
도파민덩어리였다. 매 장면이 뒤통수를 때리고 숏이 숏을, 프레임이 프레임을 배반하는데 끝내 수미상관까지 맞춰내는 생동감이 짜릿했다. 게다가 테니스처럼 선을 넘으면 안되는 스포츠를 다루면서 선을 넘는 영화라 좋더라.
- 세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연인을 이겨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그런 사람들이 또 연애 외의 일상은 건강하게 산다. (웃음) 보통 매력의 수신자와 발신자 중 발신자가 더 집착한다. 달리 생각하면 발신자는 일방적으로 상대의 매력을 받기 때문에 관계에서 사랑을 더 누릴 수 있다. 집착하는 만큼의 행복을 가져가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다 <팬텀 스레드>의 알마(비키 크리프스)처럼 자신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어떤 관계든 나를 찾고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
- 하긴 연애의 최대 효용은 끝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데에 있다.
늘 그 점을 상기하려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상대에게 나의 좋은 구석을 선물할 수 있다. 이는 좋은 영향력과도 관련이 있다. 마냥 풀어져 있으면 편하겠지만 내가 부모거나 직장 상사라면 어떤 때엔 스스로를 통제하는 프로페셔널함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좋은 아빠, 선배라고 믿는다.
- <챌린저스>와 <콜드 워> <팬텀 스레드> 모두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상대의 재능에 사로잡힌 나머지 연애를 승부로 인식하는 독특한 로맨스다.
나의 존재가 상대를 온전히 채울 수 있는 사랑, 상대의 재능에 예술적 영감을 주는 사랑 이야기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콜드 워>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파리에서 줄라(요안나 쿨리크)가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장면이다. 남편이 한 공간에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빅토르(토마시 코트)에게 달려가는, 선을 넘는 순간이다. 영화관 바깥에선 마땅히 규범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옳다. 그런데 영화관 안에선 작품이 선을 넘을 때 발생하는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고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볼 때면 내게 질문한다. 이준혁, 넌 그럴 수 있니?
- 세 작품 모두 국영수보다는 예체능에 능한 자들의 사랑 이야기다. 예술가가 주인공인 멜로는 관객과 창작자들에게 유달리 사랑받는다.
극대화하기가 좋은 이야기이고 시각적으로 구현할 장면이 많기 때문일까. 감독이나 작가가 예술가이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라 여겨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 예술이든 사랑이든 완벽한 성취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화로 대리만족하는 걸 수도 있고.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보면, 관계 안에 극단적인 규칙이 존재해도 예술가들이 게임의 주체라면 관객들이 쉽게 납득하는 것 같다. 확실히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려는 영화가 예전엔 많았던 것 같다. 마침 사회가 천재 한명을 칭송하는 분위기도 강했고. 유행은 돌고 도니까 언제든 다시 나오지 않을까. “나는 완벽했어요”라는 <블랙 스완>의 마지막 대사가 예술가들이 근본적으로 품는 환상 같다. 어떤 배우든 작품을 할 때만큼은 완벽하게 마치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바빌론>에서 완벽과 거리가 먼 촬영 현장에 나비가 날아들어 방점을 찍는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