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비평] ‘남아 있는 장소를 위한 멜로드라마’, <러브레터>
2025-01-07
글 : 김소미

죽은 잠자리가 발밑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상복을 입은 소녀는 그제야 인정한다. “아빠가 돌아가셨구나.” 잠자리가 죽은 것은 그저 과거형,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 아래 박제된 형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야말로 현재형이다. 자각이란 그런 식이다. 뒤늦게, 엉뚱하게, 잔인하게도 생생히 나타난다. 시간의 지속 속에서 우리는 그럴 때에야 이따금 ‘지금’을 산다. 감정은 아버지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처리의 과정 속에서 언제 어떻게 서 있었는가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까? 발아래를, 딛고 선 곳을 지그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편지가 향하기 위해선 언제나 수신의 장소들, 기억을 되찾고 되돌려줄 공간이 요구된다고.

마르셀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의 강의를 들으면서 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가장 유명한 대목은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입에 넣는 순간, 온몸의 신경세포가 미각으로부터 깨어나 기억의 시냅스에 불을 켜는 순간이다. 문학과 철학의 영역에서 자주 채택되어온 이 정신의 축복을 영화는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간편한 대답으로는 물론 플래시백 몽타주가 있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역시 플래시백의 지속 시간을 점차 늘려가면서 두명의 후지이 이츠키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서사적 구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플래시백은 히로코와 이츠키가 서로의 이야기를 전하는 편지처럼 수단 또는 매개일 뿐이다. 눈여겨보고 싶은 부분은 플래시백과 편지가 시차를 넘나들도록 가능케 하는 무대들, 그러니까 계속해서 한 자리에 남아 있는 장소들을 연결고리로 묶는 영화적 태도다.

엄마와 삼촌의 계략으로 결국 병원에 떨어진 이츠키가 진료 순서를 기다리면서 잠든 순간으로 돌아가면, 간호사가 이츠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타고 몽롱해진 정신의 틈새가 열린다. 같은 복도를 지나쳐 응급실로 이송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나가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두 공간이 한 사람의 정신에서 중첩되는 이때, 처음 <러브레터>를 보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혼란스러워할 만한 또 하나의 과거 조각이 등장한다. 출석을 확인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교실 속의 소년. 이츠키가 또 다른 이츠키를 처음 마주한 기억이다.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잠든 기억이 깨어나게 된 것은 이츠키가 그동안 기피하던 공간(병원)에 자리한 까닭이고, 점멸등처럼 번쩍거리는 플래시백은 인물의 내면에 무언가 새로이 촉발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가 된다.

병원 복도를 매개로 첫 번째 기억의 발사체를 쏘아올린 이후, <러브레터>에는 끊임없이 이츠키-히로코를 연결하는 실타래로서 이중의 장소성이 부각된다. 히로코는 죽은 이츠키가 어릴 때 살던 집이었으나 도시 개발 과정에서 국도가 되어버린 곳에 편지를 보냈다고- 그래서 되돌아온 답장은 죽은 이츠키가 천국에서 보낸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그가 편지를 보낸 주소는 졸업앨범에 기록된 여자 이츠키의 집 주소였다. 다만 사실이 어쨌든 이츠키가 사는 집도 곧 헐릴 처지인 것은 마찬가지다. 이대로라면 몇년 안에 무너질 것이 확실한 오래된 집에서 이츠키와 그의 엄마, 할아버지는 죽은 사람의 추억을 품고 산다. 고즈넉한 옛집의 미래는, 히로코가 구태여 이제는 터널이 되어버린 국도 한가운데를 쓸쓸이 걷는 앞선 장면의 이미지로서 암묵적으로 예견된다. 그리고 <러브레터>에서 기억을 복원하고 재인식하는 행위는 장소를 지키는 선택으로도 이어진다. 잠정적으로 이사를 합의한 상태로 그려졌던 이츠키의 가족은 영화의 말미에 그 계획을 철회한다.

한편 두 이츠키가 머무는 중학교 도서관은 쏟아지는 빛 속에서 수호받는 공간처럼 그려진다. 플래시백 속에서 그곳은 잠정적인 영원에 다름 아니다. 성장한 이츠키가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사서라는 사실에 과거의 시절은 얼마나,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러브레터>가 발설하지 않으나 도착하는 질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죽은 연인과 그의 오래된 첫사랑을 질투해 마지않는 히로코는 죽은 이츠키의 방을 그대로 보존한 어머니의 집에서 자신의 속내를 겨우 털어놓는다. 히로코가 이츠키를 잡아먹은 산을 향해 소리치는 설원 위, 이츠키가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얼어붙은 호수 위는 순백의 지속성을 보여주고, 살아 있는 이츠키에게 또 다른 이츠키의 죽음을 알리는 학교 선생님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긴 시간을 통과한 후에도 여전히 모든 아이들의 학급 번호를 기억하는 선생님은 과거 장면을 돌이켜보아도 결코 특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러브레터>의 마지막 장면은 도서부 후배들의 방문으로 집 앞마당에 선 이츠키의 모습으로 끝난다. 전학을 앞둔 소년 이츠키가 불쑥 집으로 찾아왔을 때 현관문을 열고 섰던 소녀 이츠키는 이제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나가 마당 담장 앞에서 예정에 없던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도 건네받았으나 열어보지 않았던 책의 앞면을 펼쳐서 마침내 도서카드를 뒤집어본다. 후지이 이츠키가 <러브레터>에서 되찾은 모든 것은 와타나베 히로코와 그의 편지를 전한 우체부, 죽은 학생을 기억하는 학교 선생님과 도서부 소녀들이 되돌려준 것이다. 자세히 뜯어보면 도플갱어나 학교의 정령들같이 다분히 환상적인 설정을 내포한 인물들이지만, 결정적으로는 삶이 필요로 하는 오래된 장소와 관계맺고 있다는 점에서 친밀한 인간의 조건을 달성한다. 이는 영화 매체가 시간과 공간 위에 버티고 서는 존재 방식과도 연결된다. 때로 시간의 포화를 이겨내서 과거보다 현재에 더 긴요한 재인식으로 나아가는 방법론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그루의 자작나무가 자라날 공간, 편지를 받을 주소가 남아 있기만 하다면. 인물과 카메라가 그곳을 찾아간다면. 주의 깊게 인지하지 못했던 과거는 언제든 재발견의 빛을 우리에게 내보일 준비가 되어 있다. 때로 잠깐의 오인과 혼란을 불사하고서라도.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