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누가 더, 라고 말할 수 없는 세계’, 김화진 소설가의 <러브레터> 에세이
2025-01-07
글 : 김화진 (소설가 <나주에 대하여> <동경>)

김화진 소설가(<나주에 대하여> <동경>)

<러브레터>를 다시 봤다. 처음 이 영화를 본 것은 몇년 전 연말이었는데, 다시 보는 지금 역시 연말. 어떤 영화를 보는 일이 그 영화의 작동 방식과 비슷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지나간 시간이 자꾸만 지금의 내게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이 영화가 마침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서일 테니까.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나, <러브레터> 별로 안 좋아하는데…’라고 생각하며 보기 시작해서, 후반부를 지날 때 즈음이면 여지없이 운다.

영화는 산에서 조난당해 죽은 애인의 추모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죽은 이는 후지이 이츠키, 남은 이는 와타나베 히로코. 히로코는 죽은 애인의 집에서 그의 부모님이 보여주는 그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보고, 당시 그가 살던 오타루의 주소를 손에 적어 간다. 이후에 히로코는 그 주소로 짧은 편지를 쓴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으며. 그런데 그 편지에 답장이 온다. 후지이 이츠키로부터. 감기에 걸렸지만 잘 지낸다는 짧은 내용이다.

영화는 차차 이 편지 소동이 어떻게 된 일인지, 우연한 펜팔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말도 안되는 환상에 가까운 일화처럼 시작한 일련의 사건들은 의외로 말이 되는 현실의 기적에 가까운 일화로 밝혀지며, 이 놀라운 과정 동안 영화는 차분하고 담담하다. 마치 신중하게 눈길을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종일관 담담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다가 갑자기 조금 내려앉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발자국보다 어떤 발자국 하나가 훨씬 깊이 찍히는 순간인데, 내가 느끼기에 그 순간은 모든 일이 밝혀지기 시작하는 순간. 히로코가 자신의 애인인 이츠키에게 중학교 때 동명이인의 여자 친구가 있었으며, 그 여자와 자신의 생김새가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아직 잊지 못하는 나의 죽은 애인이, 사실 나를 사랑한 이유가 내가 그의 첫사랑과 닮아서였다면 나는 그와 나눈 마음과 시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리고 그 장면에서 나는 나의 첫 번째 발표 소설을 떠올렸다. 그 소설의 제목은 <나주에 대하여>이고 이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1년 전 애인이 죽었고, 이후 인터넷에 남은 애인의 흔적을 찾다가 애인의 전 여자 친구 ‘나주’를 찾게 된 여자 ‘단이’의 이야기. 단이는 죽은 애인 ‘규희’로부터 종종 이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 나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규희는 나주를 ‘나와 무척이나 잘 맞던 사람’이라고 평하고, 반대로 단이는 ‘나와 다르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누군가와 닮았기 때문에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사람과 누군가와는 다르지만 네가 좋다는 말을 들은 사람 중 더 슬픈 사람은 누구일까? 모르긴 몰라도 단이와 히로코는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네게 뭐였어, 같은 질문을 품게 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에게 동시에 질투를 느낀다는 점에서 말이다.

히로코는 이츠키에게 이츠키와의 추억이 없는지 물으며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의 일화를 알아가고, 단이는 나주의 SNS를 통해 규희와 나주의 흔적을 스스로 찾는다. 스스로 찾아낸 흔적보다 생생한 것은 역시 당사자로부터 듣는 지난 시간의 이야기들이다. 히로코가 듣게 되는 것들은 이렇다. 사람들이 읽지 않는 책을 빌려 처음으로 대출 카드에 이름을 적는 것을 좋아했던 이츠키.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이츠키. 경기를 앞두고 트럭에 치인 이츠키. 깁스를 한 채로 막무가내로 경기장에 난입해 뛴 것이 마지막 달리기 경기였던 이츠키.

히로코에게 그 일들을 편지에 적어 보내는 이츠키는 왜인지 무척 열심이다. 열심인 것은 단이도 마찬가지다. 누가 들려주지 않기에 단이는 몇개의 파편적인 흔적을 매일매일 복기한다. 기억하면 기억나는 지난날, 지난날의 사람을 가진 사람들은 아름답다. 그들은 가끔 영화가 되고 소설이 된다. 그러나 이츠키의 말처럼 “현실은 살벌한 것”이어서 그들이 나누는 지난날 외에, 그들이 통과하는 지금 이 시간은 그렇게 가뿐하지 않다. 히로코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으며, 이츠키의 감기는 낫지 않는다.

히로코에게는 그와의 미래를 그려보고 싶은 남자가 곁에 있지만, 히로코는 아직 이츠키의 옆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관계를 보며 <나주에 대하여>의 인물들에게도 다음이 있다면 어쩌고 있을지 처음으로 생각해보았다. 단이에게 시간이 흘렀다면. 규희와 나주 중 누굴 더 많이 생각할까.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츠키 역시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받던 중, 오랜만에 찾아간 모교에서 만난 선생님으로부터 이츠키가 2년 전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아마도, 이츠키와 나주도 만나면 할 말이 많지 않을까? 죽은 이의 옛 애인이었던 나주와 애인은 아니었던 이츠키 중 더 슬픈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막막한 슬픔의 장면을 쓰거나 보고 나면, 항상 유치하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누가 더 슬플까? 그런 내게 답이라도 주듯이, 영화가 다음 장면으로 답한다. 펜팔을 하는 히로코와 이츠키처럼. 여긴 누가 더, 라고 말할 수 없는 세계야. 그렇게 말이다. 어느 것 하나를, 그것이 조금 더, 라고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총합의 세계가 바로 살아 있는 사람이 계속 살아야 하는 세계다. 영화 속 살아 있는 인물들과 영화를 보는 살아 있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그 세계.

<러브레터>를 볼 때마다 기어이 울고 마는 장면은 고열로 쓰러진 이츠키를 업은 할아버지가 눈길을 달리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장면과 동시에 히로코의 세계에서는 이츠키가 조난당했을 때 함께였던 동료 ‘불아범’을 방문하는 시간이 그려진다. 이츠키의 아버지가 폐렴으로 죽었을 때 그를 구하지 못한 할아버지는 손녀 이츠키가 쓰러졌을 때 다시 한번 손녀를 업고 뛴다. 친구가 조난당해 죽음을 맞이한 산에 홀로 사는 동료는 친구가 죽은 그 산에 남아 등산객을 돕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한 사람을 가운데 끼워넣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사이인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에서든 가운데 서 있던 사람이 사라지면, 양옆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자리만큼 떨어졌던 사람과 붙어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주에게 자꾸만 다가가고 싶은 단이, 이츠키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은 히로코의 마음도 그 비슷한 것 아닐까.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어, 그러니 우리 조금 더 붙어 서지 않을래? 하고 묻는, 기대어 서는 마음.

사람을 잃고 사람을 돕는 마음. 첫사랑에 대한 알쏭달쏭한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 <러브레터>에는 그런 것이 있다. <러브레터>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징검다리 삼아 지금을 걸을 때, 내가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이 글을 쓸 때는 새해였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며 새해에 발표된, 지난 나의 소설을 생각했다. 규희를 떠나보낸 나주와 단이에게도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요, 히로코가 보내는 인사처럼.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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