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김성훈 기자의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취재기 (2019.12~2021.11.11)
2022-05-24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지옥의 문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n번방 취재 및 보도 자료를 정리한 표가 세트장 한쪽 벽에 붙어 있다.

2019. 12

“선배 인스타그램 없앴어?” 김완 <한겨레> 기자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갑자기 사라져 이상하다 싶어 텔레그램에 들어가 그에게 물었다. 김완은 박근혜 정권 때 국정원이 ‘엔터팀’을 운영해 영화계를 사찰했다는 내용의 단독 보도를 함께했던 동료다. 그에게 짧은 답장이 왔다. “ㅇㅇ 신상 털려서 다 비활성.” 그는 “‘청소년 텔레그램 비밀방’에 불법 성착취 영상 활개”(<한겨레> 2019년 11월10일자) 단독 보도를 시작으로 텔레그램에서 벌어지는 아동·청소년 성착취 사건을 연달아 보도하던 때였다.

수면 위로 올라온 텔레그램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끔찍했다. <한겨레>가 지난 두달 동안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라는 제하의 연속 기획으로 보도한 기사는 충격적이었다. <한겨레> 기자들이 텔레그램 익명 대화방에 잠입해 그 실태를 지켜본 뒤 폭로한 내용에 따르면, 범죄자들은 일자리를 주선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텔레그램 방으로 유인해 사진, 영상을 찍도록 협박하고, 수천명이 모인 익명의 대화방에 대량 유포했다. 피해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해자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연속 보도로 추적단 불꽃의 존재도 처음 알게 됐다. 미디어를 전공한 대학생 2명(추적단 불꽃)이 지도 교수의 제안으로 공모전 ‘제1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에 나가기 위해 ‘불법 촬영’과 관련한 자료를 조사하다가 텔레그램 익명방을 접하게 됐고, 그곳에 잠입해 지켜본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의 실태를 최초로 폭로했다. <한겨레>는 이를 ‘n번방 사건’으로 처음 호명하며 연속 보도를 시작했다.

텔레그램이라는 특수한 온라인 환경에서 피해 여성의 신상을 치밀하게 털었고 수천명, 수만명에 이르는 구경꾼들에게 가상화폐를 받아챙긴, 새로운 유형의 범죄임에도 <한겨레>와 추적단 불꽃이 연일 내놓은 보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더군다나 첫 보도가 나가자마자 텔레그램에서 신원이 명확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가 김완 기자의 SNS를 뒤져 그와 그의 가족 사진을 털었다. 여느 아동·청소년 성범죄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김완의 취재는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2020. 3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검거.

2020. 5

김완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진성 감독님이 연출하는 넷플릭스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어.” 무슨 영화인지 물어보니 알려주지 않았다. 최진성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다. “넷플릭스 찍는다면서요.” 답장이 왔다. “정리되면 말하려고 했는데 n번방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려고요.” n번방? 몇몇 감독과 프로듀서가 n번방 사건을 극영화로 만들려고 시도했다가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라 감당하기 부담스러워 보류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실제 사건을 재가공할 여지가 많은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실존 인물이 등장해야 하는데, 사건의 피해자가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무사히 진행될 수 있을까.

2020. 5. 11

n번방 개설자 ‘갓갓’ 문형욱 검거.

김완 기자(왼쪽)와 최진성 감독이 촬영 전 주고받을 질문을 맞춰보고 있다.

2020. 10

서울시 상암동의 한 고깃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최진성 감독, 김완, 오연서 <한겨레> 기자, 최광일 JTBC 탐사보도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이하 <스포트라이트>) PD, 최은정 조감독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최 감독은 이들을 “다큐멘터리 출연자”라고 소개했다. 오연서는 김완 기자와 함께 n번방 사건을 보도한 기자다. 최광일은 ‘박사방’의 운영자인 박사(조주빈)를 취재한 내용을 방송에 공개한 PD로, 기자가 모태펀드 블랙리스트를 취재하기 위해 ‘역삼동 모 주택’에 잠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된 사건을 <스포트라이트>에 소개할 뻔한 적 있다. 최광일 PD는 박사방 취재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박사가 가족의 신상을 파겠다고 협박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스포트라이트> 방송으로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겠다는 협박이었다.” ‘박사방’에서 김완의 신상이 털렸고, 더 많은 아동·청소년 여성들을 <한겨레> 보도로 인한 피해자로 만들겠다는 내용과 똑같은 협박이었다. 저마다 n번방 사건을 취재한 후일담이 오갔다. 최 감독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보를 함구한 채 “추적단 불꽃을 포함한 출연진들은 사전 인터뷰를 진행한 뒤 촬영에 돌입할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최진성 감독이 인테로트론을 통해 카메라 너머에 있는 김완 기자에게 질문하고 있다.

2020. 10. 14

대법, 조주빈 징역 42년 확정.

2020. 12

오후 8시밖에 안됐는데 가로등이 없고 한겨울인 탓에 사방이 암흑천지다. 얼마나 달렸을까, 파주의 모 세트장에 겨우 도착했다. 며칠 전 최진성 감독이 연락해와 “우리 촬영 시작했는데 놀러올래요? 김완이 출연하는 장면이에요”라며 촬영 현장에 초대해주었다. “국내에선 한번도 진행된 적 없는 스타일의 다큐 현장일 거”라는 예고와 함께. 굳게 닫힌 세트장 문을 낑낑거리며 열자 극영화 현장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세트가 한눈에 들어온다. 세트 가이드를 자처한 최진성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등장인물마다 각기 다른 컨셉의 공간 6개(두 공간은 리모델링을 해서 영화 속 인터뷰 공간은 총 8개)를 만든 거라고 한다. 이날 촬영의 주인공인 김완 기자의 공간으로 이동하니 촬영을 준비하는 스탭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카메라 옆을 지키던 박홍열 촬영감독(<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여배우는 오늘도> <밤의 해변에서 혼자> 등 촬영,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연출)이 반갑게 맞는다. 카메라에 연결된 프롬프터 같은 장치가 눈에 들어온다. “인테로트론(에롤 모리스 감독이 1980년대 고안한 장치)이에요.”(최진성) 인터뷰이가 관객의 눈을 보고 직접 대화하는 듯한 효과를 만드는, 일종의 텔레 프롬프터다. 옆에 있던 박홍열 촬영감독은 “인터뷰이의 시선이 관객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보통의 다큐멘터리와 달리 이 장치는 김완 기자가 관객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말하는 듯한 효과를 준다”고 설명했다. 최진성 감독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이 이건 당신에게 하는 얘기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주고 싶어서 이 장비를 활용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감독과 촬영감독으로부터 한참 설명을 듣던 중, 김완 기자가 헤어·메이크업을 마치고 세트로 들어왔다. 그는 “서사에서 어떤 역할인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내가 어떻게 n번방 사건 취재에 뛰어들게 됐고, 취재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얘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테로트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최진성 감독과 김완 기자를 보니 관객도 n번방 사건을 자신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몰입할 수 있을 듯하다. 자정이 가까워져서 세트장을 나오니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김완 기자를 인터뷰하고 있는 최진성 감독(오른쪽).

2021. 11. 11

텔레그램 n번방 최초 개설자 ‘갓갓’ 문형욱 징역 34년형 확정.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공범 ‘부따’ 강훈 징역 15년형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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