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씨네21> 신년호 특집 기사 ‘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에서 최진성 감독은 극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주진우 전 <시사IN> 기자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을 추적한 <저수지 게임>(2017) 등 다큐멘터리 두편을 연달아 작업했던 그가 전작 <소녀>(2013) 이후 오랜만에 극영화 도전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계획처럼 되는가. 그가 내놓은 신작은 ‘n번방 사건’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다.
- 극영화를 준비하다가 다큐멘터리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가 무엇인가.
=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는 영화에 대한 투자가 멈췄다. 그러던 중 넷플릭스로부터 다큐멘터리 연출을 제안받았다. 보나마나 제작이 1년 이상 걸릴 건데 이 과정을 돌파하는 게 늘 만만치 않아서 또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OTT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적정한 자본이 투입된 웰메이드 다큐멘터리를 작업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넷플릭스가 아니었다면 굳이, 또, 다큐멘터리를 연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 n번방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 아이템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다른 범죄 사건과 저울질을 했는데 n번방 사건은 ‘뉴타입 크라임’이었다. 텔레그램이라는 특수한 온라인 공간에서 가상화폐를 대가로 아동·청소년 성착취가 이루어지고, 미국, 영국, 일본 같은 다른 국가도 이 방식을 모방하는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데다 여성들의 피해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범인이 잡히기 전이라 현재 진행형인 이 범죄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사회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 당시 충무로에서도 몇몇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n번방 사건을 영화로 만들려다가 손을 떼거나 보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얘기한 대로 현재 진행형이고, 여성들의 피해가 끔찍한 사건이라 뛰어들기가 쉽지 않은 소재인데.
= 연출 계약서 도장을 찍기 직전에 ‘박사’가 잡혔다. 범인이 체포돼야 영화 서사가 완성되는데 박사가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박사가 잡히지 않더라도 기록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기자, 추적단 불꽃, PD, 경찰 등 주요 등장인물들을 사전 취재했었다. 그 과정에서 짜릿하고 흥미로웠던 건 그들이 각자 취재했던 내용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쭉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를 펼치려고 했다가 인물 각각이 맡은 역할이 전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여러 인물이 릴레이하듯 서사를 끌고 가는 현재의 형식이 되었다. 사건에서 취재한 영역도, 맡은 역할도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라는 것.
- 텔레그램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가 어떻게 벌어지는지 1인칭 시점으로 펼쳐낸 오프닝 시퀀스는 짧지만 임팩트가 강하다.
= 관객을 구경꾼의 위치에 두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휴대폰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범죄라는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 SNS상에서 벌어진 범죄를 그려냈던 할리우드영화 <서치>를 레퍼런스 삼아 텔레그램의 레이아웃을 활용한 그래픽으로 n번방 사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도 있었다.
- 등장인물 중에서 김완, 오연서 <한겨레> 기자와 추적단 불꽃, 두 집단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시켜야 했던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 개인적으로 스릴러 장르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나에게 스릴러가 뭐냐고 물어보면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지옥 같은 상황에 휘말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빠져들었다가 끝내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 n번방 사건은 경찰, JTBC <스포트라이트>팀 등 등장인물 누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꽃’이라는 평범한 대학 졸업반 학생 두명이 공모전에 지원하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다가 ‘사이버 지옥’을 만나는 순간 그 사건에 휩쓸려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사연이 무척 흥미로웠다. 결과적으로 그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인생이 다 바뀌었다. 김완 <한겨레> 기자도 마찬가지다. 레거시 미디어 중에서 가장 먼저 이 사건 취재에 뛰어든 김완 기자도 처음에는 n번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가 깊숙이 추적하면서 사건에 빠져든다. 추적단 불꽃과 김완, 오연서 기자가 만나는 지점이 굉장히 영화적인 순간이라고 보았다.
- 추적단 불꽃은 단순히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범인을 추적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몸을 사리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 기자들은 수습 과정에서 사건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기자니, 취재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대학교 4학년생들이, 20대가, 레거시 미디어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영역까지 뛰어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추적단 불꽃처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못할 것이다. 대학생이 가진 에너지, 20대 청춘의 뜨거운 열정이 이 사건의 중요한 트리거로 작동한 게 아닌가 싶다.
- 영화는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도록 등장인물에게 받은 범죄 자료 대부분을 모자이크, 블러 처리해 보여준다. 윤리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태도를 지키는 일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중요했을 것 같다.
= 피해자가 찍힌 사진, 영상 자료는 영화에 단 한컷도 쓰지 않았다. 블러 처리된 이미지조차 실제 자료가 아니라 제작진이 연출해 재현한 거다. 실제 자료를 블러 처리하는 것조차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고, 그게 창작자로서 피해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보았다. 인터뷰 사이에 애니메이션과 재연 영상을 배치한 것도 피해자가 겪은 범죄 상황을 어떻게 하면 간접적이면서도 묵직하게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다. 이 밖에도 남성 연출자가 피해 여성을 만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여성 조감독이 직접 피해자에게 연락해 양해를 구한 뒤 피해 기록을 듣고, 그걸 재가공해 영화에 배치시켰다. 넷플릭스와 제작진 또한 그러한 윤리 원칙을 공감하고,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 이 다큐멘터리는 장르영화처럼 서사 전개가 무척 빠르고, 서스펜스를 공들여 구축하는 데다가 음악이 긴장감이 넘친다. 그렇게 연출한 이유가 무엇인가.
=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다시는 이같은 범죄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서사에 몰입하는 게 중요했고, 그러려면 일반 관객에게 익숙한 문법으로 서사를 전개시키는 게 필요했다. 연출자로서 피해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라고 스스로 질문했을 때마다 항상 무기력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고, 그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으니까. 하지만 창작자로서 피해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추적극이라는 장르 문법을 통해 나쁜 놈은 반드시 잡힌다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게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았고, 그거 하나만 보고 달려왔다.
- 곧 공개를 앞두고 있는데 어떤가.
= 비슷한 범죄가 전세계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많은 분들이 봐주었으면 좋겠다. n번방 사건은 뉴스에서 접할 때와 너무나 다른 사건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범인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지도, 이렇게 많은 가해자들이 지능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는지도 몰랐다. 범죄자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치밀했고, 추적자들은 그보다 더 치열했다. 그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봐주길 기대하고 있다. 개봉했으니 그간 빠져 있던 ‘사이버 지옥’에서 이제는 도망가고 싶다.
- 차기작은 무엇인가.
= 덱스터스튜디오에서 내부고발자가 된 스파이를 그린 <인사이드맨>이라는 제목의 극영화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