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번방 사건으로 많은 언론과 인터뷰했고, 강연도 했고, 정부 부처 회의에도 참석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대와 지지를 구하기도 했고.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로 한 이유는 그런 활동의 연장선인가.
= 아무래도 기사나 유튜브는 사건을 단면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텔레그램이라는 특수한 온라인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가 벌어지는 구조를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최진성 감독님으로부터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넷플릭스를 구독하는 이용자 수가 많고, 나 또한 구독자인 데다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2020)를 재미있게 봤던 터라 넷플릭스라면 급하게 제작하지 않고 높은 완성도로 이 사건을 다룰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컸다. 촬영한 지 약 2년이 지난 까닭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웃음) 사전 질문지를 포함해 150~160개 정도의 질문에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 넷플릭스가 글로벌 OTT 플랫폼이라 해외 이용자들에게도 선보일 수 있다는 점도 출연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 그렇다. <오징어 게임> <소년심판> 등 사회적 메시지를 다룬 넷플릭스 작품들을 흥미롭게 보았다. 넷플릭스에서 영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가 자막으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전세계 이용자도 성범죄와 여성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리라고 생각했다. 기존 언론은 n번방 사건을 단순 범죄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지 고민하는 관객에게 이 작품이 여성과 아동·청소년 인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추적단 불꽃이 기성 언론과 달랐던 점은 단순히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널리즘’의 역할을 넘어 피해자와 연대하고, 범죄자를 잡기 위해 추적하는 ‘아웃리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 우리 역할을 처음부터 그렇게 정한 건 아니었다. n번방 사건을 알게 된 계기도 교수님의 제안으로 공모전에 나가기로 했고, 공모전 아이템을 찾다가 불법 촬영과 관련한 자료를 모니터링하게 됐고, 그러다가 와치맨이 운영하는 ‘고담방’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n번방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곳에서 자행됐던 범죄의 실체를 추적하다가 취재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러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다 경찰의 소극적인 대응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관료주의적 문화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우리 또한 기자가 사건에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경찰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활동을 했다.
-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에 언급했던 것처럼 ‘채증 사진’을 반복 확인해 피해자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썼듯이 이 작품 또한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가 되지 않게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 심지어 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다. 최진성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은 2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자료를 확인하고, 재가공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활동하는 단체라 이런 부분들까지 고려해서 촬영이 진행됐고,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실명이 아닌 단과 불로 계약했다. 제작진과의 연락도 여성 조감독님을 통해 진행했다.
- 영화가 공개되고 난 뒤인 5월24일 화요일 밤 11시 <씨네21> 트위터 스페이스 ‘다혜리의 작업실’에서 진행하는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할 예정인데.
= n번방 사건이 세상이 알려지고 2, 3년이 지난 뒤에 이 영화가 공개되지 않나. 범인의 일부가 잡혔다고는 하지만 피해자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또 해결되길 원하는 익명의 감시자들이 있다. 다혜리의 작업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디지털 성범죄 사건과 아동·청소년 인권 문제를 알릴 수 있는 방송이 되길 기대한다.
- 어떤 관객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길 원하나.
= 넷플릭스의 한국 구독자들뿐만 아니라 <오징어 게임>을 본 분들은 다 봤으면 좋겠다. (웃음) 이 영화는 연출된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던 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디지털 성범죄와 아동·청소년 성착취에 대한 논의가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n번방 사건은 인생을 바꾼 사건이기도 한데.
= 이 사건 이전에는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평범한 학생 기자였다.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에도 언론고시를 준비했었는데 이 보도로 아무리 상을 많이 받아도 꿈에 그리던 기자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스스로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조주빈이 잡히고 난 뒤 추적단 불꽃 활동을 했던 지난 2, 3년 동안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 같다는 거다. 뭐든지 하면 되는 거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세상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거다. 그게 또 어떤 결실을 거둘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