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가 5월17일 개막했다. 프랑스에선 현재 실내외를 막론하고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돼 사실상 칸영화제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씨네21>도 2019년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3년 만에 칸을 찾았다. 개막작인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파이널 컷>을 시작으로 총 21편의 경쟁부문 상영작을 보고 화제작들의 소식을 전할 예정이다. 올해 한국영화의 칸 진출 소식도 풍년인데,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한국배우들과 한국에서 찍은 <브로커>가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오징어 게임>의 스타 이정재 배우의 감독 데뷔작 <헌트>가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섹션에 초대받았다. 더불어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 문수진 감독의 단편애니메이션 <각질>도 칸에서 상영된다. 우선 1357호에선 칸영화제 초반의 분위기와 경쟁작 개괄, 개막작 리뷰, 한국영화 소식을 전한다. 칸의 경쟁부문 레이스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파리행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지난해엔 쉬었지만 올해는 칸으로 향한다는 영화인도 다수였다. 칸에서 보자며 잡았던 약속이 무색하게,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비행기 안에서 격식을 차리지 못한 공항 패션으로 마주쳐 민망한 미소를 주고받는 상황도 연출됐다. 파리까지 직항으로 통상 11~12시간 걸리던 비행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14시간이 넘게 걸렸다. 전쟁 발발 후 러시아는 유럽연합 국적기들이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했고, 기내 모니터에 뜬 비행 경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아래쪽, 아제르바이잔과 터키, 루마니아 상공을 거쳐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에선 5월16일부터 대중교통 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풀렸다. 사실상 ‘노 마스크’의 일상이 된 셈이다. 거리에선 거의 모두 마스크를 벗고 활보했다.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조심스레 마스크를 벗고 생활해보니 당혹스럽게도 기분 좋은 해방감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덮쳤다. 중요한 걸 빼놓고 있다는 느낌, 중요한 걸 잊어버렸다는 느낌이 끈적하게 온몸에 달라붙었다. 당연히 극장에서도 마스크 착용은 자율이다. 칸영화제의 상영관에선 영화가 시작되기 전 마스크를 착용해달라는 당부의 안내 방송이 나왔지만 마스크를 쓰고 영화를 보는 사람은 소수였다.
올해 칸영화제에선 코로나19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더 중대한 이슈로 여겨지고 있다. 5월17일 열린 개막식 무대에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으로 등장해 영화의 힘, 영화의 목소리를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찰리 채플린이 <위대한 독재자>(1940)를 만들어 나치와 히틀러를 풍자했던 것을 언급하며, “독재자가 있다면, 자유를 위한 전쟁이 있다면, 영화는 침묵해선 안된다. 우리 시대의 영화가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새로운 채플린이 필요하다”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올해 칸영화제는 일찌감치 ‘러시아 보이콧’을 통해 평화 수호의 제스처를 취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와 지지의 의사를 분명히 하며 러시아 공식 대표단은 초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그렇기에 경쟁부문에서 상영되는 러시아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에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는데, <레토>(2018), <페트로프의 플루>(2021)에 이어 세 번째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세레브렌니코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를 떠나 현재 독일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전까지 러시아 정부의 탄압과 반대로 칸영화제에 입성할 수 없었던 세레브렌니코프는 이제야 칸의 레드 카펫을 밟게 되었다.
거장들의 귀환과 주목해야 할 젊은 감독들
좀비 코미디물이자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 <파이널 컷>으로 몸풀기하듯 막을 올린 칸영화제는 18일부터 본격적으로 경쟁부문 21편의 상영에 돌입했다. 올해 경쟁부문에는 역대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만 4명(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감독은 한몸으로 계산하여)이나 포진해 있다. 황금종려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다르덴 형제는 벨기에에 정착한 두명의 아프리카 이민자의 삶을 다룬 <토리와 로키타>로 다시 칸을 찾았고, <더 스퀘어>로 2017년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로 또 한번 신랄한 풍자의 재미를 안길 것으로 기대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2007년 최고의 영예를 안았던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은 트란실바니아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신작 <R.M.N.>을 완성했고, <어느 가족>으로 2018년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기생충>의 스타 송강호 그리고 강동원, 배두나, 이지은 등 한국 배우들과 한국에서 ‘입양 로드무비’ <브로커>를 완성해 칸에서 첫선을 보인다.
경쟁부문 라인업이 공개된 뒤 언론이 보인 관심의 선두 자리에는 단연 데이비드 크로넌버그가 있다. 거장의 도발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크로넌버그는 <데드라인>과의 인터뷰에서 “상영 시작 5분 안에 퇴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마지막 20분이 무척 힘들다고 했다”며 ‘친절하게’ 관람 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함을 넌지시 알려줬다. 감독의 인터뷰는 확실한 미끼가 되어 ‘5분 만에 자리를 뜰지라도 직접 확인은 해야겠다’는 마음을 기자들에게 심어주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미래 사회의 신체 변형을 다루는 크로넌버그의 <크라임즈 오브 더 퓨처>에는 크리스틴 스튜어트, 레아 세두, 비고 모텐슨이 출연한다. 어떤 종류로든 강력한 호오를 부르는 도발적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민자>(2013), <투 러버스>(2008) 등에 이어 이번이 5번째 칸 경쟁부문 진출이지만 유난히 상복은 없었던 제임스 그레이 감독에 대한 사전 관심도 높다. 앤서니 홉킨스와 앤 해서웨이가 출연하는 <아마겟돈 타임>은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된 영화로, 198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또 다른 미국 감독 켈리 라이카트는 <쇼잉 업>으로 뒤늦게 칸에 첫 입성한다. 여성 조각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쇼잉 업>은 켈리 라이카트가 선보이는 고요하고도 잔잔한 그러나 그 파장이 꽤 큰 어느 예술(가)의 초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한명의 거장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 이후 6년 만에 신작 <헤어질 결심>을 칸에서 공개한다.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에 이은 4번째 칸 경쟁부문 초청이다. 박해일이 변사 사건을 맡은 형사 해준을 연기하고 탕웨이가 사망자의 아내 서래를 연기하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연상케 하는 캐릭터 포스터에서는 어느 각도에서든 보는 이의 시선을 붙들어두는 각 인물들의 눈빛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다. 수사물이자 멜로라는 장르적 힌트가 주어졌지만, 작품의 윤곽은 영화를 보기 전까지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프랑스 현지 시간 기준 5월23일, <헤어질 결심>은 베일을 벗는다.
주목해야 할 젊은 감독의 명단도 꽤 된다. <걸>(2018)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과 퀴어종려상을 받은 루카스 돈트 감독은 두 번째 장편 <클로즈>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역시나 <처음 만난 파리지엔>(2017)의 레오노르 세라이예 감독도 두 번째 장편 <어머니와 아들>로 거장들과 경쟁하게 됐다. <경계선>(2018)으로 예사롭지 않은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알리 압바시 감독의 신작 <홀리 스파이더>, 타릭 살레 감독의 <보이 프롬 헤븐>도 눈여겨볼 작품으로 거론되고 있다.
팬데믹 이전의 영화제처럼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은 프랑스 배우 뱅상 랭동이 맡았다. 뱅상 랭동과 함께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은 영국의 배우 겸 감독 리베카 홀, 인도 배우 디피카 파두콘, 스웨덴 배우 노미 라파스, 이탈리아 배우 겸 감독 재스민 트린카, 이란 감독 아시가르 파르하디, 프랑스 감독 레주 리, 미국 감독 제프 니콜스, 노르웨이 감독 요아킴 트리에 이상 8명이다. 올해 심사위원 성비는 남녀 동수이며, 배우 출신이 많다는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지난해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2021)의 주인공이자 <아버지의 초상>(2015)으로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뱅상 랭동은 2009년 이자벨 위페르 이후 오랜만에 프랑스 영화인으로서 심사위원장을 맡게 됐다. 그는 심사위원 스피치를 통해 “용기, 충성, 그리고 자유를 향한 비밀스러운 희망을 품은 미래의 영화들”에 힘을 실어주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시대의 비극을 응시하고 그것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영화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심사위원장의 성향은 올해 수상 결과의 향방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현재적 비극을 마주한 채 제75회 칸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개막 둘째날, <탑건: 매버릭>의 레드 카펫 행사 때문인지 크루아제트 거리는 한껏 멋을 낸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새벽까지 계속되는 축제의 열기. 모두가 조금은 흥분되어 있는 듯한 상태는 앞으로 열흘간 더 고조될 것이다. 마치 팬데믹 이전으로 시계를 되돌린 듯한 칸의 열기가 몹시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