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은 해준(박해일)이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미결 사건’을 맞닥뜨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떤 사랑과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이자 멜로드라마인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애꿎고 지독한 취향이 아름답게 맺힌 작품이면서 동시에 전례 없이 애틋한 감정을 철썩철썩 건네는 영화다. 박찬욱 감독이
-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공개된 뒤 히치콕과 비교하는 외신이 많았다.
= (히치콕 영화를 참고하겠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히치콕을 피해가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황했다. 한두명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니까. 한편으론 한두명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니까 그것도 맞나보다 하고 받아들이게 되더라. 오랫동안 좋아했던 감독의 영향이 의도하지 않아도 영화에 드러날 만큼 내게 남아 있었나보다,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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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반작업 중에 정서경 작가가 런던에 놀러 왔고, ‘우리 이제 뭐 할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되었다. 지금 하는 것과는 다른 성격의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번에도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당시 읽고 있었던 추리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와 유튜브에서 들은 정훈희의 <안개>가 직접적인 이유였다. 특히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의 엔딩에 큰 감동을 받아서 처음엔 그 엔딩을 그대로 사용해 영화를 만들려 했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 형사가 수사 중인 용의자가 진범이라는 확신을 갖고 용의자의 아파트에 찾아가 자백을 권유하고 기다리는 상황이 길게 묘사되는데, 너무나 영화적이면서 비영화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게 로맨스영화고 용의자를 여자로 각색하면 어떨까, 앞의 이야기는 전부 새로 쓰되 마지막 부분만 소설에서 가져오면 어떨까, 그 장면만을 위해서라도 판권을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지 한달도 안돼 마르틴 베크 이야기는 사라져버렸지만.
- 결국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서 가져온 건 해준이라는 형사 캐릭터에 대한 참고 정도였나.
= 마르틴 베크의 팬들이 영화를 본다면 ‘뭐가 비슷하다는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 유튜브에서 문득 들은 <안개>가 영향을 미쳤다고도 했는데.
= 유튜브는 본격적으로 음악을 감상할 때 이용하는 매체는 아니지만, 예전에 들었던 한국 가요와 그 노래를 부른 가수들의 얼굴이 보고 싶을 때 가끔 이용한다. 주로 듣는 건 산울림, 송창식, 신중현, 김추자의 노래들, 그리고 작곡가 이봉조 선생의 노래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1960~70년대 명곡들이다. 그날은 우연히 <안개>를 들었는데, 자동 추천으로 트윈폴리오의 <안개>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콘서트에도 여러 번 갈 만큼 송창식씨의 팬이었는데 <안개>를 커버한 줄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대에서는 정훈희, 송창식씨가 <안개>를 자주 불렀더라. 녹음으로 남겨진 것은 없지만.
- 서래는 외국인이라는 정체성, 중국인이라는 설정이 중요한 인물이다.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으로 서래를 그린 이유가 있나.
= 예술적인 대답이 아니어서 민망한데, 탕웨이와 같이 작업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아무리 탕웨이라는 배우를 좋아해도 이것이 창조적으로 좋은 결정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탕웨이를 캐스팅하려면 서래는 중국인이어야 하는데 그 중국인은 한국에서 어떤 위치와 상황에 놓여 있을까 고민해보니 보통의 로맨스영화와는 다른 레이어를 더할 수 있어 그 즉시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됐다.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중국인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을 테고 그런 인물이 해준 같은 남자를 만났을 때 어떤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그 사랑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길지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어딘가에 걸쳐 있는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해선,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영애 배우가 연기한 소피 장이라는 한국계 스위스인 군 수사관 캐릭터를 만들 때도 비슷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다음 작품으로 작업 중인 <동조자>에도 혼혈인 베트남 군인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북베트남에 충성하는 프랑스-베트남 혼혈 스파이 캐릭터다. 양쪽에 걸쳐 있는 정체성. 그런 주제에 끌리는 것 같다.
-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캐릭터가 들어오면서 영화에 풍부한 뉘앙스가 생겼다. 서래가 구사하는 언어, 말투 등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나.
= 정서경 작가와 정한 것은 쉬운 한국어를 쓰되 현대인이 쓰는 유행어는 피하고 오히려 현대 한국인보다 더 정리된 문장, 질서 있는 표현을 쓰는 거였다. 사극을 통해서 한국어를 배우고, 물론 처음에는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겠지만, 그래서 고풍스러운 표현을 쓰는데 그것이 때로는 우리보다 더 품위 있는 말로 들리고 때로는 엉뚱한 용법을 구사해 웃기기도 한다. 종합적으로 원했던 건 한국 사람이 볼 때 틀린 표현은 아닌데 왠지 모르게 귀에 설고, 어색하긴 한데 나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분명히 잘 아는 한국어인데 단어만 따로 떼어서 썼을 때, ‘마침내’ 같은 단어를 딱 떼어서 쓰면 무심코 쓸 때와 달리 자꾸 주목하게 되는 것처럼 낯설게 하는 효과를 주려 했다. 또 해준은 배려심이 넘치는 인간이니까 뭐든지 쉽게 말해주려 하고, 후배한테도 쉽게 설명하라고 시키고, 그러다보니 말이 꼬이고. 그런데 상대방이 “나 그 말 잘 아는데” 하면서 “간병인은 방수 용품 많이 씁니다” 하면 좀 멋쩍어지고. 그런 유의 유머도 재밌을 것 같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통역 앱을 사용하는 것이다. 흥분해서 빠르게 열변을 토하는 상황에선 일단 중국어로 말하고 통역 앱을 사용한다. 관객 입장에선 이때 해준과 동일시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해준이 서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지연되는 시간, 그 답답함을 관객이 똑같이 체감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통역 앱을 통해 전달되는 말 또한 우스꽝스럽다. 건조하고 플랫한 목소리로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 있기도 한 엉터리 한국어가 흘러나온다. 의미가 전달된다고 해서 그 말이 정확하게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뜻을 모르고 바라봤던 서래의 표정, 손짓, 발짓, 어조들을 기억에서 불러냈다가 (통역 앱으로) 방금 들은 말과 결합해야만 통합된 의미와 감정을 전달받을 수 있다. 그것이 참 특이한 영화 관람의 체험일 것 같았다. 시각 요소와 청각 요소를 관객이 사후에 능동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경험.
- 공간으로 보면 산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나는 이야기다. 산과 바다라는 자연에서 가져오고 싶었던 심상이나 이미지가 있었다면.
= 각본 집필 과정에서 정서경 작가가 생각해낸 건데, 서래는 <산해경>(중국의 오래된 지리서)을 통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다. 이 <산해경>은 어디서 온 거냐, 서래의 외할아버지가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을 방랑하면서 가지고 다니던 것이다. <산해경> 자체가 여러 필자들의 이야기가 보태져 확장된 책이니까, 서래의 외할아버지인 계봉석씨도 여기에 자신의 것을 보태지 못할 이유가 뭐냐는 생각으로 조선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덧붙여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계봉석판 <산해경>을 만들었다. 그것이 유품으로 서래에게 전해졌고, 외할아버지에게 긍지를 갖고 있는 서래는 그걸 소중히 가지고 있다가 한국어를 공부할 때 그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자신만의 공책을 하나 만들었다. 그게 간병하는 할머니들한테 읽어주는 녹색 표지의 공책이다. 이 부분이 영화에선 많이 축소되었지만, 미술팀이 이 배경을 바탕으로 엄청난 일러스트를 넣은 공책을 만들었다. 그 안의 글씨는 모두 탕웨이가 직접 썼다. 한글을 우리보다 훨씬 예쁘게 쓴다. ‘산을 좋아하느냐 바다를 좋아하느냐’ 하는 이야기도 <산해경>과 동시에 등장한 대사다. 산을 너무 좋아한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와 산을 싫어하는 서래 그리고 을지로가 고향이지만 바다를 좋아하는 해준. 이렇게 바다 타입의 인간들끼리 같은 종족이라고 느낀다. 거기에 살을 붙여 바다를 좋아하는 바다의 사나이 해준은 일부러 부산을 근무지로 택했고, 또한 해군 출신이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나왔다.
- 해준은 서래에게 “당신은 몸이 참 꼿꼿해요”라고 말하는데 이건 감독님이 탕웨이라는 배우를 보고 느낀 감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탕웨이도 그렇고 박해일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 관객도 그걸 알기를 바라고 썼다. 그러니까 사실은 자기(해준) 얘기이기도 하다는 거. 그래서 또 한번 둘은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부분은 박해일의 연기에서 손꼽히게 좋은 장면이다. 박해일이 보여준 엉뚱한 해석이 돋보이는 장면인데, 대사 자체가 조금 웃기긴 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웃기게 표현할 줄은 몰랐다. 너무 정색하고 진지하게 역설하듯이. 무슨 반공 웅변대회에 나간 것처럼 대사를 연기하는데, 현장에서 아주 빵 터졌다. 그 장면과 더불어 탕웨이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아니라”라고 말했을 때 박해일이 “아아아~~~~” 하고 길게 말을 빼는 장면. 그때도 한참 웃었다.
- 박해일은 낯선 해석과 새로운 톤의 연기를 보여준다.
= 처음에는 앓는 소리를 많이 하더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런 거냐 저런 거냐 질문도 많이 했는데 특별히 알려준 정답은 없었다. “너를 생각하면서 한줄 한줄 쓴 대사인데 네가 그걸 못할 리가 있어? 그냥 우러나는 대로 해봐.” 배우들은 우리와는 다른 인종이라서 인물의 배경과 이력을 논리로 설명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별것도 아닌 것에서 영감을 받아 출발하기도 한다. <스토커>를 찍을 때도 희한한 경험을 했다. 당시 배우 매슈 구드도 본인의 캐릭터를 잘 모르겠다고 앓는 소리를 좀 하더니 어느 날 술집에서 같이 술을 마시다가 술집 벽에 걸려 있던 싸구려 초상화, 특별한 인상을 주지 않는 어떤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유화를 보더니 바로 저거라고 하더라. 거기서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다. 아마 박해일도 그런 게 있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 이 인물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피부에 와닿은 순간이 있었을 거다.
- 박해일과는 이번이 첫 작업인데 왠지 이전에 한번쯤 같이 작업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윤태용 감독의 <소년, 천국에 가다>라는 작품에 공동 각본으로 참여했고, 그때 박해일이 주연을 했던 게 전부다. 그에게 보낼 만한 배역이 그동안은 없었나보다.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될 것 같은 배우 그룹에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같이하면 되지 뭐 하는 식으로. 전에는 박해일, 조승우, 류승범 세 배우를 같이 묶어서 많이 얘기했잖나.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개성이 확연하게 다른 저 셋을 데리고 영화 하나 찍으면 기가 막히게 재밌겠다. 그런데 내가 청춘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어서…. (웃음)
- 탕웨이는 <색, 계> 때부터 쭉 좋아한 배우라고 했는데, 이번 작업에선 창작자로서 어떤 모습을 보고 싶었나.
=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 그때 참 많은 것을 보여주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고집스럽다는 느낌은 실제로 만나고 나서 더 굳어졌다. 탕웨이는 자기가 믿는 바가 확실하고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사람이다. 물론 개구쟁이기도 한데, 깊은 곳에는 자신의 원칙이 있다. 그런 고집스러움이 꼿꼿한 자세를 만들기도 하고, 그런 고집스러움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 <헤어질 결심>은 완성된 시나리오에 배우가 들어온 게 아니라 배우가 들어오면서 시나리오가 완성된 경우다. 두 작업 방식을 비교하면 어떤가.
= 일단 각본을 쓸 때 좀 불안하다. 이 캐스팅이 성사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싶어서. 만약 탕웨이가 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를 들어 서래를 탈북민으로 바꿔 한국인 배우를 캐스팅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서 많이 본 영화 같아서 별로고. 걱정이 많아서 각본을 완성하기도 전에 일단 탕웨이를 만나서 말로 영화를 설명해야만 했다. 박해일도 마찬가지였다. 차이라면 그런 거다. 불안한 거. 시나리오를 빨리 써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결국에는 완성도 못한 채로 캐스팅에 뛰어들어야 했다. 특정 배우를 상정하고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지금껏 그 배우가 다른 사람의 영화에서 보여줬던 인상에 의존해서 쓰는 것이라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아는 탕웨이, 내가 아는 박해일에서 출발하지만 내가 모르는 박해일, 내가 모르는 탕웨이에 도착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조심해야 할 문제다. 배우가 먼저 캐스팅되었을 경우엔.
- <남한산성> <밀정> <달콤한 인생>의 김지용 촬영감독과는 이번이 첫 작업이었다.
= 직전에 <리틀 드러머 걸>을 김우형 촬영감독과 찍었는데 그때도 그와 처음이었고, 이번에도 낯설지 않았다. 정정훈 촬영감독이 너무 유명한 분이 되어서 함께하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이제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프로젝트를 할 때 셋 중 한명은 시간이 되지 않겠나. (웃음) 김지용 감독이 젊어서 나보다는 필름 룩에 대한 집착이 좀 덜했다. 나는 구식이라 지금이라도 필름으로 찍을 수만 있으면 필름으로 찍고 싶은 사람인데, 한국에선 그럴 수 없으니 필름 룩을 내야겠다는 욕심이 강하다. 그게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의 미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냥 내가 필름 룩에 대한 애정을 못 버리는 인간이라 이번에도 빈티지 렌즈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 차기작인 <HBO> 시리즈 <동조자>는 현재 어느 단계에 와 있나.
= 7개의 에피소드인데 5개까지 각본을 썼다. 전체 에피소드를 연출하지는 않을 것 같다. 쇼러너이자 작가로서 전체를 관장하지만 직접 연출하는 건 세편 정도일 듯하다. 일단 각본을 모두 쓰는 게 벅차고, <리틀 드러머 걸> 때 경험해보니 6편 연출이 체력적 한계더라. 또 어떤 에피소드는 상당히 독립성이 있어서 개성 강한 다른 감독이 연출하면 오히려 더 재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