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네 성적으로 아무 데도 못 가는 게 차별이고 부정이야!” 끝까지 우영우(박은빈) 곁에 서서 부당함에 맞서길 주저하지 않고 퇴근까지 반납하며 맡은 사건을 준비하는 최수연을 보며 생각했다. 저런 변호사라면 내 사건도 믿고 맡길 수 있겠다. 배우 하윤경이 연기한 최수연은 한바다 로펌 소속으로 맡은 일을 꼼꼼히 해내는 정의로운 변호사이자 사랑에 있어선 실패도, 의외의 선택도 하는 인간적인 캐릭터다. 은연중 최수연을 떠올리며 만난 하윤경은, 기사에 녹음본을 첨부하고 싶을 정도로 다부지고 단단하게 답을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이르기까지, 배우 하윤경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았다.

= 감독님과 작가님이 현장에서 많이 이야기해주셨고,재판 진행에 관한 영상 자료 같은 것도 보내주셔서 참고했다. 사실 직업보다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는 편이다. 같은 변호사여도 영우는 사건에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민우(주종혁)는 사건의 주변 상황까지 약삭빠르게 살피는 편이지 않나.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일을 대하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수연이라는 사람에 관한 연구를 더 많이 했다.

= 처음엔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대본 앞부분만 봤을 땐 여느 평범한 20대 후반의 직장인처럼 보여서 어떻게 캐릭터 라이징을 해야 하는지 뚜렷하게 다가오지가 않았다. ‘봄날의 햇살’이라는 설명은 처음부터 있었기에 “그럼 수연이는 착한 인물인 건가요?” 하고 작가님과 감독님께 물었다. “맞는데, 착하다는 것에 얽매이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수연이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완전무결하진 않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면들, 솔직하고 신중하고 똑 부러지는 모습들이 수연이와 잘 어울린다고 하셨다. 그럼 너무 강박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내 행동 반경 안에서 캐릭터를 찾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어느 정도는 맞는데 스스로 따뜻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수연이도 똑같이 생각할 거라고 하시더라. 스스로 따뜻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자신의 선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나오는 친구고, 그걸 내가 잘 연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 그것에 관해서도 작가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 수연이는 정말 의로운 사람일까? 정말 사람이 100% 진실된 마음으로 정의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나 스스로도 때론 정의롭지만 때론 그렇지 않고, 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옳게 행동하려는 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연이 향심을 돕는 것도 혹시 학습된 결과는 아닌지, 편견에 휩싸여 있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랬더니 그 고민조차 너무 수연이답다고 하시더라. 수연이는 류재숙 변호사(이봉련)처럼 항상 정의의 편에 서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항상 고민하고, 자신의 실수에 자책도 하면서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 그런 걸 보면 또 타고나길 선하긴 한가보다 싶고. (웃음) 다만 손해를 봤을 때 성자처럼 다 괜찮다, 이런 건 아니고. 어찌 됐든 영우에게 자격지심은 갖고 있는데 그걸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는 자존감도 있다.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고 그런 자신에게 만족하기 때문에 혹여 뒤처진다 해도 금방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영우를 미워하기보단 그냥 ‘내가 뒤처졌구나’ 하고 넘길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추구하는 마인드이기도 하다. 질투와 자격지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어딨겠나. 그래도 그런 감정을 기분 좋게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 민우와의 관계도 그렇고 후반부에 수연이가 사랑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많이 하시는 것 같더라. 나는 어쩌면 그게 수연이를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일 수 있겠다고 여겼다. 일 잘하는 정의로운 변호사고 영우에겐 아주 좋은 친구지만, 그런 사람이 자기 사랑에 있어서는 조금 헛발질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사랑까지 잘하면 지나치게 완벽하지 않나. 초반에 작가님, 감독님이 얼핏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수연이는 연애에서까지 완벽하진 않을 것 같다고. 처음부터 어느 정도 큰 틀은 잡아두셨던 것 같다.

=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매우 감동적이긴 했는데 이 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감정 연기 전에는 대본을 많이 보지 않는다. 몰입하면 오히려 감정을 잡기 어려울 때가 많아서 실눈 뜨기를 하며 무심해지려는 편인데, 그 신은 리허설 때 가볍게 맞춰보는데도 감정이 올라왔다. 은빈이도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이 신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여러차례 이야기했는데 현장에서 담백하게 잘해줬다. 찍을 당시엔 내가 너무 표현을 안 했나 싶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맞았구나 싶다. 감정이 과했으면 오히려 시청자들이 공감을 못하셨을 거다.

= 그땐 정말 열심히 했다. 노력한 티가 나서 성적을 잘 주신 게 아닌가 싶다. 입시 학원이다보니 다들 예민해서 시기와 질투가 엄청났다. 계속 1등을 하니까 학원에 백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학원에서 아무리 잘해봤자 소용없고 어찌 됐든 원하는 대학에 잘 진학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결국 좋은 학교에까지 붙었으니 평생의 운을 다 끌어다 썼다고 생각했다. (웃음) 연기 자체는 대단한 마음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활동적이고 예체능에 관심이 많은데 그 모든 걸 종합해 재밌게 할 수 있는 게 연기 같았다. 학원에서도 성적이 좋고 대학도 잘 갔으니 부모님이 응원을 많이 해주셨는데, 한편으론 그게 다 운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대학이 끝이 아니라 졸업한 후에도 계속 좋은 작품을 만나 좋은 배우가 되어야 하는데 처음엔 그러지 못했으니까. 믿어주시는 한편 걱정도 많으셨다.

= 요즘 맨날 전화하신다. 오늘은 친구 누구누구가 네 기사를 봤고 오늘 드라마는 어떤 장면이 좋았고. 수다쟁이가 다 되셨다.

= 지금은 많이 바뀌었는데 10여년 전만 해도 촬영장에서 비인간적으로 행동하는 분들이 많았다. 다들 힘들고 예민하다 보니 강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고. 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회사 없이 혼자 의상을 이고 지고 다니면 무시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래서 독기를 품고 더 열심히 했다. 그래도 그때의 경험 때문에 더 단단해졌다. 지금은 웬만한 일은 그냥 넘길 수 있게 됐다. 와중에 좋은 동료와 작품을 만나는 단비 같은 시간도 있었고. 합리화일 수 있겠지만 마냥 행복하게만 일했다면 과연 배우로서 더 좋았을까 싶다.

= 마음을 내려놓고 갔는데 붙어서 놀랐다. 어쩌면 그렇게 수수하게 하고 가서 선빈이 역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때가 정말 힘든 시기였다. 연기가 나랑 잘 맞지 않는 것 같았고.

= 지금도 자주 한다. 생각이 많고 스스로 반문을 많이 하는 편이기 때문에 아마 무슨 직업을 가져도 그랬을 거다. 나이는 먹는데 자리는 못 잡았고, 일도 없고. 이런 불확실한 직업을 오래하진 못하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만난 작품이었다. 아직 포기하지 말고 더 해보라는 계시처럼 느껴졌다.

= 학교 다닐 때 연기적으로 좋았던 떄가 있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다.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정말 좋아하는데 리나 역할로 연극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내가 연기한다는 사실도 잊고 정말 그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관객도 그걸 알았는지 감동받고 우시더라. 지금도 그런 순간을 만나길 바라면서 계속 연기한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갈매기>의 리나로 다시 한번 무대에 오르고 싶다.

= 메시지도 중요한데 그 메시지를 다루는 방식이 제일 중요하다. 메시지만 허울 좋게 갖다놓는 작품도 많다. 주제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전달 방식을 얼마나 깊게 고심했는지가 내겐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경아의 딸>도 연기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감독님이 오랜 시간 고민하고 준비하신 게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굉장히 도전적이고 뜻깊은 작품이다.

= 더 장르적인 작품을 해보고 싶다. 어두운 장르영화도 좋고 액션, 스릴러, 깊이 있는 멜로도 좋다. 내가 의외로 악역을 해본 적이 없다. 시나리오가 잘 들어오지 않더라. 내 성격이 정말 괜찮아서 그런 건가? (일동 웃음)

= 사실 모든 장르를 좋아하긴 한다. 공포영화는 귀신이 나오거나 잔인한 거 말고 <유전>이나 <미드소마>처럼 심리적인 공포를 잘 구현해낸 작품을 좋아한다. <미드소마>의 플로렌스 퓨가 연기한 대니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다. 플로렌스 퓨를 정말 좋아한다. 거칠고 반항적이면서도 파워풀한 에너지가 정말 좋다. 나보다 어리지만 언니라고 부른다. 멋있으면 다 언니니까. (웃음) 언젠가 강한 역할을 꼭 해보고 싶다. 보기보다 에너지가 꽤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