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그 세계에 스며들다
여기 모인 분들은 과거에 연예인을 사랑하고 덕질을 해본 경험이 있다. 이 마음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왜 우리는 팬질을 멈출 수 없었나. 몇번의 실망과 탈덕을 거치며 더이상 팬심을 갖지 못하게 된 분들이 있다면 그 사연도 궁금하다.
오세연 사고 같은 게 아닐까. 일부러 좋아하려고 물색해도 안 보일 때가 있는데 원치 않게 갑자기 스며들 때가 있다. 일단 그 세계에 들어가고 나면 한 사람을 파헤치는 것도, 그로 인해 온오프라인에서 알게 되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도 좋아서 덕질 자체에 중독되는 것 같다. 연예인에게 애정을 쏟는 것도 어떻게 보면 습관이다. 덕후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해야 하는 일들이 정해져 있고 그게 일상의 재미가 되는 사이클이 된다. 오빠의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웃음)
김다은 가치관에 영향을 많이 받는 스타일로 덕질을 했다. 사실 B그룹의 G가 매력적이었지만 그는 인기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나는 G 옆에 붙어 있는 S를 좋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너무 빠지게 된 거다. 영화에도 나왔던 S의 솔로 앨범 가사를 보면서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는 내게 그가 직접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이거 말하다 보니 자꾸 흑역사가 되는데…. (웃음) 내가 진해에 사는 학생1이 아니라 영화감독 같은 특별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힘을 얻었다. 이후에는 연극배우도 좋아했고, 많은 감독과 PD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 자체도 덕질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내가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어 있더라. S처럼 어떤 문제가 생긴 게 아닐지라도 현실에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 매스컴이 만들어놓은 우상화를 실제가 따라갈 수 없다.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다면 판타지로 남길 수 있게 선을 두고 싶다.
최지은 한국에서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출구가 가장 필요한 집단은 10대 여자아이들이 아닐까. 10대부터 덕질을 하다 3, 40대가 된 사람도 많고 중년에 덕질에 뛰어드는 사람도 늘어났지만 대부분 10대부터 20대 초반쯤 덕질을 시작한다. 요즘은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내가 청소년이던 90년대 중후반에는 이성 교제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덕질은 10대 소녀들에게 에로스·플라토닉·아가페적 사랑을 모두 아우르는, 거의 유일하게 허락된 형태의 사랑이었다. 나에겐 또래 집단과 가까워지는 가장 좋은 매개가 아이돌이기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루하고 좁고 평범한 세상을 사실 좀더 즐거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달리 배우지 못했다. 한국에서 K팝 아이돌과 팬덤 문화가 이렇게까지 발달한 것에는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이중에서 네 취향이 하나쯤은 있겠지” 하고 준비된 아이돌이 나오면 우리는 정말 찾을 수가 있었다. (웃음) 김다은 조감독의 말처럼 통제만 하려는 어른들과 달리 오빠들이 내가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고 다정하게 말해주면 특히 청소년들에게 굉장히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연예인을 일 때문에 실제로 만나면 그 사람이 무얼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도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계속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만났던 남성 연예인 중 이후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더이상 사람을 숭배할 수 있는 콩깍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됐다.
강은교 어렸을 땐 내가 좋아하는 그룹이 1등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아이돌의 성취에 나를 동일시하는 ‘신자유주의적 덕질’이었다. 또 그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 마음의 안정감을 주는 토템이 됐다. 지금은 팬심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보다 양식화된 것 같다. 예전엔 그저 광적인 이미지였던 소녀 팬덤이 점점 ‘시민 되기’의 과정을 거치게 됐다. 구동방신기 3인의 SM 소송, 박재범의 2PM 탈퇴 등 일련의 사건이 터지면서 팬덤은 소속사와 직접 싸우기 위해 법인을 세우고 변호사를 수임했다. 더이상 우리끼리 좋다는 감정만으로는 팬질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어떤 타협을 한다. 내가 좋아해온 것을 계속 좋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양식을 바꿔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고, 더이상 용납되지 않는 욕망이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팬덤은 굉장한 협상 행위도 하고 있다.
최지은 1세대 아이돌을 대표하는 H.O.T.가 등장하고 엄청나게 큰 팬덤이 생기면서 이들을 ‘빠순이’라 부르며 한심하게 여기는 분위기 또한 팽배해졌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이후 <응답하라 1997>의 성시원(정은지)이 방송작가가 된 것처럼 팬덤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거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 기자가 된 이후 꽤 오랫동안 아이돌 팬덤에 대한 기사를 쓸 때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함부로 취급될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고 싶었다. 팬덤은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으로 기부하고 라이벌이 생기면 온갖 여론전을 펼치는 등 정치적 존재로 진화했고, 사회 안에서 좀더 인정받는 집단이 되기 위해 강은교 연구자의 말처럼 많은 협상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