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씨네21 추천도서 - <서릿길을 셔벗셔벗>
2022-11-15
글 : 진영인 (번역가)
싱고 지음 / 창비 펴냄

‘한뼘일기’는 단구나 동요 같은 간결한 형식에 계절의 변화와 감미를 담은 기록이라고 저자는 소개하고 있다. 계절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으나 순서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읽어달라는 안내에 따라, 북쪽 찬 공기가 불쑥 내려오곤 하는 요즘의 쌀쌀함에 어울리게 4부 가을 일기로 가본다. “매미 소리 잦아들고/ 귀뚜라미 울면” (<입추>)을 읽으며 맞아, 가을이 시작하면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달라지지, 라고 고개를 끄덕여본다. 또 공기도 어느새 습기 없이 차갑다. “빨래가 잘 마른다… 바구니 속에/ 웅크린 고양이/ 코끝이 차다.”(<처서>) <가을볕>이라는 제목의 시는 창문으로 햇빛이 따뜻하게 떨어지는 바닥 공간을 찾아 잠든 고양이 그림과 함께 “고양이는 신통해/ 따뜻한 이부자리를/ 잘도 찾아낸다” 하고 다정하게 읊조린다. 홍옥, 가을장마, 도토리, 솔방울 같은 가을의 단어들이 포근하게 다가온다. 곧 다가올 겨울맞이를 위해 1부 겨울 일기로 가면, “군고구마 먹고/ 동치미 마시고/ 귤 까먹고/ 노래진 손톱 보고”(<배>)처럼 겨울만의 재미를 환기하는 구절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붕마다 “커다란 백설기” 같은 눈 쌓인 풍경을 보며 유자차 한 모금 마셔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아직은 멀게 느껴지지만 해가 지나면 봄과 여름이 올 것이다. 순두부처럼 “순하고 심심한” 날들을 보낼 수 있을 것이고, “매화 향기 십리 길을 날아서” 꽃향기에 취할 날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화전을 먹으며 “진달래의 분홍/ 처음 입으로 가져간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도 해보고 “갓 짜낸/ 물감의 윤기” 같은 생생한 봄빛을 느껴보는 순간도 올 것이다. <노을>이라는 제목의 시에는 “태양을 물고/ 볼록해진/ 저녁의 볼”이라는 귀엽고 다정한 표현이 있다. 여름 일기를 읽으며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을 먹고 애호박 젓국을 끓이고 초당 옥수수를 삶는 나날이 다시 찾아오겠다고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일상을 바삐 살다 어느 순간 문득 계절이, 자연이, 시간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고 깨닫는 순간들이 단정하고 단단하게 모여 있는 책이다.

43쪽

“무의 단면처럼/ 차고 깨끗한/ 달이 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