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작은 아씨들’ 대담④ 최종 악당 원상아가 탄생, 그 이면에는...
2022-12-23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미안한 감정은 현장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원기선 장군의 전시실은 베트남전쟁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근현대사를 집약한 미술이다. 어디에 중점을 두고 공간을 채워나갔나.

류성희 일찍부터 대본에 나와 있던 공간이라 오랫동안 공부해 준비했다. 관객 입장에서는 이 정보를 모두 알았을 때 드라마가 훨씬 재미있게 느껴지는데 과연 감독은 얼마나 보여줄지, 작가가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인지 의심하며 만들었다. (웃음)

정서경 우리가 공들여서 외면했던 대화 중 하나다. (일동 폭소) <작은 아씨들>에는 모계 플롯과 부계 플롯이 있다. 인주의 엄마, 상아의 엄마에서부터 이어지는 모계 플롯은 전면에 드러나서 사람들이 읽어내기 쉽지만 숨겨진 부계 플롯은 웬만하면 직접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인경은 아빠의 인정을 갈구하며 마치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의 조처럼 이 집단의 숨겨진 역사를 쓰려고 하는 사람인데, 미술감독님은 그 스토리를 원기선 장군 전시실로 표현했다.

류성희 곁가지가 너무 많아질까봐 원래 준비하려던 것 중에 생략한 것도 많다. 2시간짜리 영화라면 사실 전시실 공간이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됐을 텐데, 상대적으로 드라마는 그 정도로 집중하지 않고 넘어간다. 영화는 단 10분 나오는 공간이라도 가짜처럼 느껴지면 한순간에 거짓처럼 보이는데,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전해지는 감정도 달라진다. 이런 점을 고려해도 전시실이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으면 드라마 전체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세운 전략 중 하나가 벽돌에 단 명패였다.

김희원 영화였다면 더 의미를 담아 찍을 수 있는 미술이 정말 많았는데,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화면에 담기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그래도 최대한 많이 찍으려고 했다.

정서경 그런데 김희원 감독님이 어떤 분이냐면, 사람들의 다른 노력을 다 알아. 그리고 안타까워해. 하지만 본인에게 이런 감정에 대해 말하지는 않아. 왜냐하면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뒤를 돌아보며 지체하는 감정을 남기면 안된다는 거지. 감독이 모든 부담을 지는 거다.

류성희 박찬욱 감독님도 스탭들의 마음을 알아주면서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게 감독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했다.

정서경 박찬욱 감독님은 미안해하는 걸 싫어하잖아. 왜냐하면 미안한 감정은 현장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돼. 그래도 김희원 감독님은 짧게나마 미안해하시는 스타일이지. (웃음)

류성희 사실 감독이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뒷모습으로 “힘들지? 나도 알아. 나도 힘들고”라고 표현하거든. (일동 폭소)

김희원 그게 바로 감독의 퍼포먼스다. 가장 중요하다. 스탭들에게 잘 전달되어야 한다. (웃음)

정서경 사실 정란회 회원들이 죽음에 이르는 사건들도 굉장히 공들여서 셀렉팅해서 만들었다. 저축은행, 사학 비리, 부동산 투기 등 굵직한 사건들을 순서대로 엮어 마치 하나의 플롯을 만드는 것처럼 접근했다. 하지만 이게 너무 진짜로 보여서도 안됐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균형을 잡으면서 베트남의 유령들, 살아 있지만 죽어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서발턴’이 악의 핵심이라는 플롯을 숨겨두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작은 아씨들>의 구조는 여러 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악당들은 흐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정란회다. 베트남에서 원치 않은 전쟁을 하고 돌아와 국가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악당이 됐다. 마치 역사화 귀퉁이에 그려진 작은 목격자처럼, 이 모든 것을 알고 말하고자 했지만 소외된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원상아의 엄마다. 여기에서 또 소외된 사람이 있다.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던 아이, 원상아는 세겹의 소외를 당한 캐릭터다. 심지어 정란회에서도 상아를 받아주지 않고 연기를 못한다며 배우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게 여러 겹의 소외가 응축되면서 악이 자라나 최종 악당 원상아가 탄생한다.

- 집행유예로 풀려난 인주는 고모할머니가 남긴 아파트 한채 덕분에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특종을 터뜨린 인경은 뉴스 앵커 자리를 거절하고 사랑을 확인한 종호(강훈)와 해외로 나간다. 단짝 친구 효린(전채은)과 함께 한국을 떠난 인혜는 700억원을 인출해 자매에게 나눠준다. <작은 아씨들>의 결말을 두고 시청자들의 많은 의견이 있었다.

정서경 전부 논리적인 귀결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경은 목표만 알고 달려왔고 관계에 부족함이 있었다. 자기 마음에 무지했던 인경이 스스로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에 종호가 필요했다. 인경은 애초에 진실을 알아내고 싶었을 뿐 좋은 기자가 되는 게 목표였던 캐릭터는 아니다. 기자로서 미션이 끝났으니 그다음의 삶을 계획하는 단계에 접어들어 새로운 과제를 받게 된 거다. 인혜가 700억원을 찾는 결말은 처음부터 생각했다. <작은 아씨들>은 베트남전쟁에서 시작된 돈의 생애를 따라가는 이야기다. 인경은 이야기를 알아내려는 존재고, 인주가 돈을 캐내고 직접 손에 쥐려고 한다. 이들과 가장 관련이 없고 먼 곳에 있는 이가 돈을 가지고 갔으면 했다. 돈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 돈을 나눠주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돈에 얽힌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이었다면 인혜처럼 쉽게 인출하고 나눠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법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700억원이 다시 원령그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드라마 주인공이 위법 행위를 하고 끝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가이드라인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로 횡령액이 돌아가는 결말 역시 초반에 고려했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런데 이 결론은 이야기로서 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돈을 어떻게 나눠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김희원 마지막 종합 편집 CG를 완성하는 그 순간까지 고민했다. 인주가 왜 똑같이 100억원만 받아야 하냐며 인주파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면 음지에 있던 효린이파가 효린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수의 도일파도 있었다. 도일도 고생했는데 지분을 가져가야 하는 게 아니냐며…. (웃음)

정서경 아니지. 도일은 돈을 많이 가져가면 안 좋아질 캐릭터야. 대신 막판까지 시청자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져갔지.

류성희 5~6회 정도 됐을 때 무엇이라도 뒷부분에 대한 단서를 달라고 작가님에게 연락하니까 인혜와 효린이 마지막 위너라는 말을 전해줬다.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그 결론이 마음에 들었다. (웃음) 그리고 그 종착점을 향해서 갔다. 그래서 인혜가 갇혀 있던 ‘닫힌 방’의 이미지도 달라졌다. 직관적으로는 공간이 어두워야 하는데 엔딩을 생각하면 꼭 그럴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정서경 닫힌 방의 미술은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던 대담한 선택이었다. 사실 인혜가 교복을 입고 납치당한다고 대본을 썼는데, 미술감독님은 이 공간에 인혜가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웃음) 그런데 듣다 보니 나도 설득됐다.

김희원 우리는 이미 그 공간의 디자인을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에 인혜의 교복이 과연 시각적으로 어울리나…? 류성희 미술감독님이 절대 견디지 못할 것 같았고 내가 봐도 그건 좀 아니었다. (웃음) 다행히 앞에 연극 신이 있어서 연극을 하다 납치당한 설정으로 가기로 했다.

류성희 그런데 김희원 감독님도 은근히 과감한 선택을 많이 한다. 여러 종류의 벽지를 보여줬는데 결국 지금의 패턴을 골랐다.

김희원 사실 닫힌 방에서 나오는 신은 시청자가 유추 가능한 영역이 많다. 인혜가 서랍을 열어 과거 상아 엄마의 모습이 잘려나간 사진들을 보면 이 뒤에 어떤 신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는 미술밖에 없었다. 아주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거다.

류성희 사실 미술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닫힌 방이 좋았다는 거였다. <헤어질 결심> 때부터 느낀 건데, 최근 관객은 자신의 감성과 지적 욕구가 만나 샘솟는 어떤 시점에 그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비주얼을 보고 싶어 한다. 그때까지 극을 따라온 시청자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가장 이상한 미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마크 로스코의 이미지를 반영했다.

정서경 원래 미술은 이야기를 방해하면 안되는데 <작은 아씨들>은 어느 순간 미술이 자기 존재를 주장하며 이야기를 압도하는 순간이 있다. 근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특히 닫힌 방은 드라마 후반부에 나오는데, 그 시점에 미술이 시청자를 놀라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사실 이건 한 분야에서 20년 넘게 일을 한, 풍부한 데이터가 있고 데이터를 넘어설 수 있는 과감함이 가능한 프로페셔널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김희원 감독님도 너무 잘 찍었다. 신이 길지 않은 데도 사람들 인상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인혜가 납치된 상황을 미니어처로 보여주는 순간도 너무 좋았다. 미니어처 안에 들어간 하나의 인형이 된 것 같았다.

김희원 원래 대본에도 그 은유는 다 나와 있었지. 결국 인혜는 닫힌 방을 탈출해 효린과 함께 떠난다. 때문에 닫힌 방을 본뜬 미니어처를 만들어 보관할 수 있을 만큼 극강의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 화영의 집은 등장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인상적인 미술 때문에 잔상이 꽤 오래 간다. 그리고 닫힌 방과 이미지적으로 연결된다.

류성희 사실 김희원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가장 재미있던 곳이 화영의 집이었다. 언젠가 다시 등장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다시 등장할 때 이곳이 어디인지 시청자들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닫힌 방의 미니어처와 연결되게끔 벽지를 매개로 비주얼 플로팅을 짰다. 원래 톱숏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바닥도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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