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작은 아씨들’ 대담③ 화영 역에 추자현 배우가 확신이 들었던 이유
2022-12-23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여성의 폭력이 즐거움을 위해 존재할 수도 있기를

- 작가의 대본에서 영상화된 드라마까지, <작은 아씨들>의 텍스트가 비주얼화된 과정이 궁금하다. 특히 박재상(엄기준)과 상아의 집에 숨겨진 난실은 초현실적인 설정 때문에 미술감독에게 상당히 도전적인 과제가 아니었을까.

김희원 정서경 작가님의 드라마나 영화는 봤지만 대본을 본 건 <작은 아씨들>이 처음이었다. 어떤 순간에는 작가님과 깊은 대화를 나눠야 비로소 해석되는, 내가 가닿지 못한 구간도 있었다. 그럴 땐 나도 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경우에 대해 작가님과 세세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그게 감독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류성희 미술감독님은 정서경 작가님의 의도를 더 빨리 캐치하니까, 마치 통역사처럼 작가님의 언어를 해석해줬다. 그래서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류성희 그런데 내가 작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도 김희원 감독님이다. 언급하신 것처럼 난실을 만들 때 너무 고민됐다. 내가 만든 공간을 감독님이 받아줄 수 있을까? 김희원 감독님이 가우디처럼 센 이미지를 언급해준 덕분에 “드라마 미술이 이 정도까지 가도 된다”는 포용력을 보여줬다. 내가 연출할 수 있으니까 그냥 믿고 가면 된다고 신뢰를 준 거다. 덕분에 그다음부터는 막 나갈 수 있었다. (웃음)

정서경 미술감독님이 만들어낸 난실은 다른 모든 장면에 많은 영감을 줬다. 난실이 무엇이며 어디에 존재하며 왜 비밀이라는 건지 많이들 혼란스러워했지만, 다들 다른 어려운 문제를 골몰하느라 난실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런데 미술감독님은 일찍부터 난실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고민하며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줬다. 덕분에 난실이 풀릴 수 있었다.

- 난실에서 키우는 푸른 난초의 이미지는 어떻게 구체화됐나.

정서경 일단 이야기에 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박재상 재단 같은 곳에서 만들 만한 연구소는 뭐가 있을까. 아저씨 둘이 바둑 두는 모습을 떠올리다 그 옆에는 왠지 난초가 있을 것 같았다. 난초는 현실과 가장 동떨어진 식물이자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너무 기이하고 동물적이면서 식물적인 환상의 생물이다. <유령 난초>라는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난초를 향한 인간의 기묘한 욕망이 돈에 대한 그것과 흡사해서 진화된 형태의 물욕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블랙 달리아’도 많이 참고했다. 여자의 죽음은 늘 꽃과 연결되는데 죽음의 현장에 떨어진 푸른 난초가 마치 블랙 달리아 같았다.

류성희 김희원 감독님이 걱정을 많이 했다. 드라마 내내 푸른 난초가 나오는데 자칫 가짜같이 보이면 안되니까. 영화라면 CG를 입혀서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었겠지만 드라마는 그럴 시간이 없다. 그래서 다른 공간보다 먼저, 제일 먼저 난초부터 디자인했다. 패브릭으로도 세라믹으로도 만들어보고 여러 버전의 난초를 제작했다. 만드는 데 비용이 꽤 들긴 했지만 굿즈 같은 게 나오면 좋을 것 같은데. SNS를 통해 <작은 아씨들>의 벽지나 푸른 난초를 사고 싶다는 문의가 굉장히 많이 들어온다.

김희원 마지막회 난실 장면을 찍으면서 세상에 남아 있던 재고를 거의 다 소진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웃음)

- 난실은 마지막회에서 원상아가 최후를 맞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류성희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진짜 여기서 수류탄을 써야 하냐고 물으니 그런 것 같다고…. (웃음)

김희원 내가 유일하게 작가님에게 두번 되물어본 부분이었다. 정말 수류탄을 쓰나요? (웃음)

정서경 처음에는 <레베카>처럼 불 태우면서 끝내려고 했다. 레베카가 불타는 맨덜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원상아가 불타는 난실을 지켜보는 거지. 그런데 그 얘기를 하자마자 김희원 감독님이 그러는 거다. “세트는 불태울 수 없습니다.”

김희원 드라마 진행에 익숙하신 분들은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난실과 상아는 어떤 식으로든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그 방식이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가장 말이 되는 건 불이다. 하지만 그간 목조로 만든 대형 세트에 불을 지르고 촬영했을 때 완성도 대비 배우와 스탭들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작은 아씨들>에서 도일(위하준)의 아버지 희재(김명수)가 가짜로 분신하는 신도 두 테이크만 가겠다고 스탭들과 약속했던 거다. 결국 나온 아이디어가 염산이었다. <작은 아씨들>이 잔혹함의 미학을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였다면 더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주말 프라임 타임에 나가는 15세 관람가 드라마라서 수위를 많이 낮추게 됐다. 그래서 연출이 이상하다고 느낀 시청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류성희 이게 영화라면 왜 염산의 잔혹성이 이 신에서 필요한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드라마 호흡상 짧고 깔끔하게 보여줘야 하다 보니 비현실적이라는 컴플레인이 들어온 것 같다.

김희원 원래는 딱 하나만 표현하고 싶었다. 상아가 위를 올려다볼 때 염산이 눈에 떨어지는 거다. 그렇게 한쪽 눈이 타들어간 상태로 인주와 싸우다 죽는 연출을 하고 싶었는데 그건 안된다고 해서 포기했다.

- 4회에서 인주가 박재상 재단의 비서실장 수임(박보경)에게 돈을 뺏기고 맞는 장면 역시 반응이 갈렸다.

김희원 돈이 인간의 감정과 이입을 극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신이지만 어떤 시청자들은 불쾌함을 느꼈다고 했다. 시청률에 책임을 져야 하는 감독으로서 이 신이 비호감의 영역으로는 가지 않게 작가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수위를 조절했다. 솔직히 우리는 너무 좋아하는 신이다. 대본 한줄 한줄이 아까워서 작가님이 절대 분량을 줄이지 않기를 바랐다.

정서경 보통 A4 용지 기준으로 한 페이지가 넘어가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이 정도의 가치가 있는 신인가? 그런데 그 신은 대여섯 페이지까지 갔다. 그런데 감독님이 깔끔하게 너무 좋다고 해줬다. 그래서 기대감이 컸고 편집본을 본 후 굉장히 만족했다. 김희원 감독님이 이 신을 정말 아름답게 찍었고 인주의 고통이 화면을 보는 나한테도 느껴지는 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액션은 표정이라는 것을 박보경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느꼈다. 인주를 때리겠다는 의지와 기대감, 기쁨이 모두 드러나지 않나. 김고은 배우가 맞는 연기도 가짜처럼 보이지 않고 그 처절한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데 방송이 나가고 너무 부정적인 반응들이 나와 깜짝 놀랐다. 돈 때문에 인간이 맞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너무 부도덕하다고. 감독님은 어떻게 예상했나.

김희원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그 농도가 짙었다.

정서경 실제보다 부정적으로, 보수적으로 예상하는 분인데 그런 감독님마저 예상하지 못한 거다. 그래서 생각했다. 왜 나는 이 신이 좋고 어떤 시청자들은 불쾌한 걸까? 내가 생각할 때 그 신은 4회에서 중요한 신일 뿐만 아니라 <작은 아씨들> 전체에서도 중요도가 높다. 인주에게 20억원은 가난한 과거를 청산하는 계기이자 화영 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다. 나는 인주가 돈을 육체적으로 지키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코트부터 벗고 자존심도 버리고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던진다. 11회 인주가 고모할머니가 남겨준 아파트에 들어가 우는 신을 감독님이 상당히 길게 찍었다. 그때 드라마는 인주의 과거를 플래시백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청자가 직접 회상을 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할 때 그건 인주가 매를 맞던 장면이 되어야 했다.

- 하지만 9회 인주가 수임에게 다시 폭력을 되갚아줄 때는 통쾌하다는 반응이 많지 않았나.

정서경 인주가 비인간적으로 변질돼서 폭력을 행사한다며 사람들이 비난할까봐 걱정했는데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웃음) 남자들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볼 때는 그들의 고통을 보며 관중이 쾌감을 느끼지 않나. 영화에서도 어떤 남자가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죽도록 얻어 맞는 장면이 초반에 나오기 마련이다. 폭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겐 필연적인 일이다. 그런데 여성은 맞아서는 안되는 것처럼 굴거나 혹은 성폭력으로 고통을 재현하려고 한다. 수임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의 폭력도 즐거움을 위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게 가능한 표현 영역을 하나씩 넓히고 싶었다.

- 8회 마지막, 인주가 상아에게 총을 겨누는 신도 화제가 됐다. 이 역시 남성 누아르영화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한 설정이지만 <작은 아씨들>에서는 여성들이 주체가 된다. 기존 장르 문법을 답습하며 성별만 반전시킨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점도 흥미로웠다.

김희원 작가님에게 더 길어져도 괜찮다고, 더 쓰셔도 된다고 전했던 장면이다.

정서경 그래서 실제로 분량이 늘어난 신이다. 나중에 시청자 반응을 보고 더 길게 갈 필요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8회 엔딩은 처음부터 계획에 있었다. 1회 엔딩과도 연결된다. 인주는 화영이 죽었다고 80~90% 생각했지만 그가 살아 있을 수 있는 나머지 확률 10%를 무모하게 따라가는 사람이다. 다만 자신의 안전을 위해 캐리어를 벽돌로 채우고 도일에게 열쇠를 맡겨버리는 정도의 계획도 세울 수 있는 인물이다.

김희원 감독에게 난이도가 너무 높은 장면이었다. 캐릭터들의 감정이 널뛰기 때문에 배우들도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해서 효율적으로 찍는 게 일순위였다. 그다음은 아름답게 보이길 바랐다. 사실 처음엔 플러튼이나 래플스 같은 싱가포르 현지 호텔에서 찍고 싶었지만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에서 액션 신을 찍을 수는 없었다. (웃음) 튼튼한 대리석이 깔린 한국 호텔의 협조를 받아 배우들이 좀더 편한 컨디션으로 연기할 수 있었다.

정서경 그리고 배우들이 1회부터 보여줬던 감정이 연결되는 신이다. 유능한 배우라면 8회 엔딩이 앞선 어떤 신과 연결되는지 파악하고 하나씩 짚어줘야 한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두 배우 모두 감정적으로 복잡한 신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새로운 원상아가 나타났을 때 우리 머릿속에는 백치처럼 보였던 초반의 그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엄지원씨가 양식적인 배치 안에서 완벽하게 연기했던 가짜 원상아 말이다. 그리고 인주는 놀라움과 허물어짐 그리고 사실은 계획을 숨기고 있던 모습까지 함께 보여줘야 했는데 김고은씨가 연기를 너무 잘했다.

- 인주와 상아, 그리고 화영까지 세 여성이 보여주는 갈등 구도가 <작은 아씨들>의 또 다른 중심축이 됐다. 그런데 대본집과 비교했을 때 화영의 캐릭터가 많이 달라진 듯하다. 대본집에 실린 초기 대본에서는 수수하다 못해 후줄그레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조용하고 평범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정서경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겠나. 별별 아이디어를 다 내봤지만 추자현 배우는 무슨 짓을 해도 수수해 보이지 않는 분이다. 우리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가진 배우를 화영 역에 캐스팅하는 무모함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배우를 만났다. 그런데 배우가 표현하는 내면의 가난함이 얼굴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더 나이가 많은데도 진짜 화영 언니를 보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나 나나 아무 이견 없이 캐스팅했다. 추자현 배우는 가난에 대한 온갖 수식어가 써 있는 얼굴을 보여줬다. 힘없이 떨어지며 체념하는 말투도 대본 리딩 후 다시 연구하고 찾아와서 깜짝 놀랐다.

- 또 두드러진 변화는 신의 순서다. 아무래도 세 자매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나오다 보니 어떤 순서로 스토리가 제시되느냐가 해당 에피소드의 리듬감을 좌우한다.

정서경 작가가 각본을 쓸 때는 복잡성을 많이 살리려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레이어를 쌓아야 이 복잡한 이야기를 하나로 만들 수 있을지 구조를 고민한다.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복잡성을 허물어뜨리며 단순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거듭 고쳐야 하는 드라마 대본은 작업 시간이 모자라서 이야기를 하나의 이미지로 만드는 작업을 편집 과정에 기대게 된다.

김희원 아마 3~4회부터 신 순서가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드라마는 스토리보드를 풀로 만들지 않다 보니 머릿속에서 앞신의 마지막 이미지와 뒷신의 첫 이미지 정도는 정하면서 찍는다. 그래야 내가 생각하는 정도의 컨티뉴이티가 나온다. 촬영은 원래 대본 순서대로 편집한다고 생각하며 찍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세 트랙으로 진행되고, 여기에 도일 혹은 재상 혹은 상아의 트랙이 얹어지면 네 트랙이 함께 가야 한다. 편집 후 자체 내부 모니터링을 하면 어떤 순서가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이 서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인주의 이야기가 힘을 받는 회차는 인주의 장면을 좀더 붙여서 간다. 원래 생각했던 컨티뉴이티에서는 벗어나지만 감수하고 편집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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