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K팝은 실험성 강한 미디어 아트를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전시하는 산업이다. 메타버스를 통해 현실과 가상을 오가고, 사진과 영상, 심지어 미디어 파사드까지 오가는 스펙트럼과 이들의 유기성을 중요시하는 기획을 전세계 소비자들이 공유한다. 그 과정에서 비평의 언어가 대중화되기도 한다. 최근 가장 재미있는 논의를 견인한 작품은 그 어떤 영화도 아닌 뉴진스의 뮤직비디오였다. 《Ditto》를 연출한 신우석 감독(돌고래유괴단 대표)은 분명 퀴어영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퀴어성을 읽어내는 것도 과대해석은 아니라든지(그러나 감독은 해당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뉴진스의 팬을 의미하는 반희수(박지후)가 또래 남성에게 연애 감정을 느낀 후 더이상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는 10대의 심리를 회고적으로 해석한 영상이라는 분석이 인터넷상에서 화제를 모았다. 이른바 제4의 벽을 넘어서는 연출을 선보인 《OMG》 뮤직비디오에서 아이폰은 곧 아이돌을 상징한다는 세간의 추측이 맞을까? “뮤직비디오 소재가 불편하다”고 글을 남기는 네티즌에게 뉴진스의 민지가 “(정신병원으로) 가자”고 하는 마지막 장면을 두고 평론가들은 다소 폭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K팝 산업의 소비 행태를 꼬집은 위트였다거나 비판의 여지를 원천 차단한 비겁한 연출이었다는 등의 다양한 논평을 쏟아낸다.
사실 완성도 높은 K팝 콘텐츠가 팬들의 과몰입과 적극적인 해석을 낳고 비평의 대상까지 된 것은 뉴진스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뉴진스의 뮤직비디오는 ‘교복과 노스탤지어’란 K팝 산업의 검증된 공식을 트렌드에 맞게 변주하고 신 밖의 이방인이었던 돌고래유괴단의 독창적 해석을 더해 탄생했다. 그들이 발붙인 토양은 “통계상 매년 30%씩 성장하고 있는”(성원모 디지페디 감독) K팝 산업이다. 특히 ‘K팝 비디오’라 통칭할 수 있는 업계는 각각의 콘텐츠가 보장하는 완성도와 전체 브랜드를 아우르는 유기성을 부지런히 단련하며 의미 있는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어쩌면 다양한 고전 텍스트를 재해석하며 대중에게 선보이는 작업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어오는 필드일지도 모른다. 뉴진스가 구체적으로 짜인 세계관 없이 메시지를 담는다면, 올해로 만 4년째 K팝 산업에서 <보이후드>를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팀도 있다. ‘ABC’의 새해맞이 특집 방송 <딕 클락스 뉴 이어스 로킹 이브>에 출연한 보이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를 소개하는 코멘트는 “Z세대의 잇보이”였다. 요컨대 이들은 빅히트뮤직 직속 선배 방탄소년단의 성공 공식을 따르면서 (노스탤지어가 아닌) 현 세대를 특정하는 원소와 그 결합 구조를 찾아가는 그룹이다. 악마의 유구한 상징으로 여겨지던 ‘뿔’을 청소년의 성장통으로 은유하며 기획된 데뷔 앨범은 청량한 겉포장과 달리 본질은 잔혹 동화에 가깝다. “구해줘 어쩌면 난 괴물이 된지도 몰라. 버려진 날 찾은 넌 구원인 걸까. 네 날개도 나와 같은 아픔인 걸까”(<어느날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CROWN)>) 이러한 설정을 보다 과감하게 시각화한 <별의 낮잠> 뮤직비디오는 무성 호러영화의 이미지를 끌어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찾아온 변수는 코로나19였다. 팬데믹 상황에서 실제 아티스트는 대면 행사를 할 수 없는 장벽을 경험하고, 가상의 세계관 속 소년들은 “다니던 카페의 문이 꽉 잠기고 한숨을 숨겨 갑갑한 mask 뒤로 표정이 없는 내 얼굴이 싫어”(<날씨를 잃어버렸어>)라는 감정을 표현하며 동시대 청소년이 처한 현실과 보다 직접적으로 만난다. 《LO$ER=LO♡ER》 뮤직비디오에 눈에 띄게 차용된 것은 <델마와 루이스>의 엔딩이지만, 그 이전에 (아마 당시 리들리 스콧에게 영향을 줬을)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무법자들이 컨셉 클립을 비롯한 다양한 비디오 작업에서 재해석된다(심지어 하이브 사옥 내부 인테리어를 실컷 구경할 수 있는 영상, 《LO$ER=LO♡ER》(Office Attack ver.)의 부제까지 ‘하이브 무법자들’이다). 기성 권위를 거부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1970년대가 아닌 2020년대의 청년들은 반체제보다 첫사랑과의 아름다운 추락을 선택한다.
이처럼 세밀한 비주얼 스토리텔링이 누적되면서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콘텐츠는 이른바 ‘커리어 하이’라고 통칭되는 기록을 매일 수립하고 있다. 한국, 미국, 일본 유튜브 인기 동영상 차트를 동시 석권한 신곡 《Sugar Rush Ride》 뮤직비디오는 공개 5일 만에 유튜브 조회수 5천만뷰를 돌파했고, 최근까지 빌보드 차트 정상을 지켰던 SZA와 샘 스미스를 넘어 미국 앨범 차트에 해당하는 빌보드200 1위에 올랐다. 기성세대에게 반항하고 부조리에 분노했던 방탄소년단과 달리 팬데믹과 셧다운, 경제 불황은 현 시대 청춘에게 게으른 나태를 유도하고, 원초적인 쾌락은 치명적이다. 《Sugar Rush Ride》는 표백된 세계를 버리고 어른이 될 때 섹스와 약물의 유혹을 받는 시기가 오기 마련이라는 도발적인 접근을 취한다. 불과 몇년 전 친구의 존재를 꿈과 마법에 비유하던 순수한 소년들은 어느덧 성장한 뒤 낙오된 섬에서 한껏 풀린 동공으로 쾌락을 느낀다. 이는 맥락 없이 자극적인 이미지가 아닌, 10대 때 데뷔한 현실의 아티스트가 실제 나이를 먹고 치밀하게 기획된 허구의 긴 내러티브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시대를 향한 코멘트가 된다. 그리고 이같은 비주얼은 “영화는 물론 전시, 미술, 사진, 애니메이션, 음악 등 다양한 텍스트로부터 영감을 얻어”(빅히트 뮤직의 크리에이티브실/VC팀) 쌓인 레이어를 통해 빌드업된 후 완성됐다. 빅히트 뮤직의 크리에이티브실/VC팀은 “앞서 공개한 컨셉 트레일러에서 악마의 속삭임과 유혹으로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게 된 모습을 고전문학 <파우스트>의 모습을 시각화해 표현한 부분이 있으며, 컨셉 포토와 클립 그리고 뮤직비디오에서는 유혹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나 모습, 유혹하는 주체로서의 메타포 중 하나로 ‘피터팬’과 ‘네버랜드’라는 공간을 제시했다. 이들을 토대로 기획과 내용이 연결되는 선형적인 구조를 이루도록 완성했다”고 이번 앨범의 레퍼런스를 설명했다.
뮤직비디오, 세계관을 담다
SM엔터테인먼트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광야’ (KWANGYA)에 얽힌 밈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세계 최초의 메타버스 아이돌’을 표방하며 2020년 데뷔한 걸그룹 에스파의 공식 멤버 수는 현실의 멤버 카리나, 지젤, 윈터, 닝닝 그리고 가상 세계 ‘플랫’(FLAT)의 또 다른 아바타 ‘æ’를 합쳐 총 8명이다. 데뷔곡 제목이기도 한 ‘Black Mamba’는 인간과 æ의 싱크(SYNK)를 저지하는 SM 컬처 유니버스의 메인 빌런이며, 에스파의 《Next Level》에 등장하며 널리 알려진 ‘광야’는 æ들이 살고 있는 플랫 너머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무규칙, 무정형, 무한의 영역을 의미한다. 《Next Level》의 “나비스(nævis) 우리 æ, æ들을 불러봐”에서 나비스는 에스파와 아바타를 서포트하는 든든한 조력자다. 편하게 듣던 유행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SM 컬처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학습해야 하다니, 뒷걸음질치고 싶은 이도 있을 테다. 하지만 에스파는 일견 허무맹랑하고 진입 장벽이 높게 느껴지는 세계관을 뮤직비디오를 포함한 각종 비디오 연작을 통해 기어코 증명하려는 그룹이다. 과거 K팝 비디오가 뮤직비디오 중심으로 기획되며 음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집중하거나 그들의 외모를 부각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면, 다양한 티저와 트레일러로 종류가 분화된 이후 이 산업은 앨범 컨셉과 세계관, 패션, 퍼포먼스 등을 세분해 보여주고 융합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타깃에 맞는 프로모션인 동시에 보다 섬세한 그룹 브랜딩을 가능케 한다. 이를테면 에스파는 디지털 싱글 《Next Level》을 공개하기 앞서 SM 컬처 유니버스를 설명하는 에피소드 《ep1. Black MambaꠓSM Culture Universe》를 통해 그들의 세계관을 공들여 설명했다.
이후 보다 대중적으로 소비될 뮤직비디오는 핵심만을 보여주면 된다. 《Next Level》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VM 프로젝트 범진 감독은 “본편 뮤직비디오에서는 사뭇 설명적이고 지루할 이야기는 과감하게 줄이되 핵심 설정은 제일 중요한 구간에서 선보이길 원했다. ‘광야’라는 이색적인 세계가 멤버들이 등장하고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장소에 비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아이돌과 멀티버스란 생소한 조합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시공간이 뒤섞인 혼돈의 비주얼을 보여주되 피어나는 금속의 꽃이나 《Black Mamba》의 주된 배경인 지하철이 허공에 부서져 표현되고, 폭발하는 화산을 배경으로 노래하는 인물 등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연출했다. 대중에게 다소 진입 장벽이 있는 세계관은 오히려 팬덤의 몰입을 부르고, 아바타 4인의 직접적인 노출은 ‘메타버스’를 포함한 최신 IT 트렌드를 부지런히 좇는 이들에게 좀더 보편적으로 가닿는다. 기존 K팝 소비자들이 중요시하는 퍼포먼스를 부각하는 연출도 돋보인다. “I’m on the Next Level Yeah 저 너머의 문을 열어”에서 등장하는 팔동작과 이를 담는 카메라워크, æ가 등장하는 후반 댄스 시퀀스는 안무가와 연출가, 각 분야 스탭들이 긴밀히 소통하며 탄생했다. 한편 《Next Level》을 연출한 범진 감독에게 비주얼적인 영감을 준 건 “스탠리 큐브릭 작품의 배경과 패턴, 타셈 싱의 <더 셀>의 구조와 색감”이다. 《Next Level》은 2021년 멜론 연간 차트 5위에 오른 히트곡이며,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는 등 비평적 성취까지 이뤘다. 스토리텔링부터 비주얼까지 다양한 SF 장르에 근간한 에스파의 콘텐츠를 ‘최근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SF물’로 평가해도 무리가 없다.
영화와는 다른 문법으로
이같은 K팝 산업과 K팝 비디오의 성장세는 단지 자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공격적인 투자 덕분에 글로벌 시장에서 선전했다기보다는 먹힐 만한 콘텐츠를 만들었기 때문에 금전적 성공을 거두고 산업에 돈이 몰린다는 인과로 현상을 해석하는 편이 논리적일 수도 있다. 다만 내수 시장만으로 비용을 충당할 수 없고 자국 소비자들에게는 끊임없이 퀄리티에 대한 압박을 받는 산업적 특성, 브랜딩과 질 높은 스토리텔링을 위한 꾸준한 투자가 빛을 본 방탄소년단의 성공 사례가 K팝과 주고받는 영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국 콘텐츠 산업은 끊임없이 퀄리티에 대한 압박을 받는 곳이다. 통상적으로 ‘괜찮은 퀄리티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데 드는 제작비는 3억5천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고, 단적으로 말해 K팝 비디오는 ‘가성비’가 보장되는 분야는 아니다. 하지만 단일 콘텐츠의 조회수보다는 그룹 브랜딩 효과에 집중하는 산업 분위기는 종종 연출자의 개인적 야심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모든 사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연출자에게 예산 규모 대비 많은 재량을 허락하며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게끔 허락한다. 기본적으로 확고한 마니아층의 충성도가 중요한 K팝 산업은 가장 메이저와 근접한 서브컬처이기도 하다. 세밀하게 타기팅한 소비자의 심미적 니즈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다소 마이너하게 취급되던 예술 양식이 뜻밖에 수면 위에 오르고, 전세계로 시야를 넓히면 수치적으로 많은 이의 선택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개별 콘텐츠의 스타일은 영화를 지향할 수 있지만 이 산업이 콘텐츠를 만드는 공식은 영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K팝 비디오에는 영상의 공식 연출자 외에도 음악을 만드는 A&R(artists and repertoire) 팀과 기획자, 많게는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의 자본을 굴리는 경영자 집단, 결정적으로 콘텐츠에 몰입한 팬덤이 주인 의식을 갖고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K팝 산업은 거대한 인터액티브 미디어 아트의 위치를 동시에 점하고, 현재 진행형으로 진화하고 있다. K팝 비디오는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문법을 만들어가고 있다.
박스/앨범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프로세스
K팝 산업에서 아티스트의 ‘컴백’은 음악 외에 새로운 컨셉 포토와 영상 클립, 트레일러,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 다양한 의상을 선보인다는 의미와도 같다. 실제 프로세스 역시 비주얼 크리에이티브와 브랜드 디자인, A&R, 퍼포먼스 디렉팅 팀이 함께 모여 모든 작업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게끔 작업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여기서 아티스트가 표현하는 모든 시각적 요소를 기획, 제작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비주얼 디렉터는 외부 포토그래퍼와 뮤직비디오 감독 등과 가장 밀접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역할을 한다. 빅히트 뮤직의 크리에이티브실/VC팀은 그들의 작업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컨셉 포토나 뮤직비디오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을 극대화할 수 있는 분들과 함께 한다. 명확히 전달됐으면 하는 키포인트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함께 방향을 잡는다. 컨셉의 아주 구체적인 부분까지 설정하고 명확한 톤 앤 매너를 구성하기 때문에 사전 논의가 무척 중요하다. 현장은 물론 후반 작업까지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결과물을 완성한다.” 물론 모든 K팝 비디오가 이같은 작업 공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뮤직비디오 감독의 자율적 해석을 중요시하고 팬덤의 목소리를 즉각 반영하는 케이스도 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300여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디지페디 성원모 감독은 회사마다 의뢰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고 설명한다. “어떤 기획사는 그룹, 앨범, 곡에 얽힌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을 A4 5~6장 분량으로 공유해준다. 그룹의 서사를 더 중요히 여기는 특정 기획사는 아예 스토리북을 만들어서 주기도 한다. 반면 구체적인 설정을 두지 않아서 디지페디 팀이 주체적으로 관여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그룹의 경우 치밀한 설정이나 이야기를 정하기보단 모호한 소재를 던져주는 식으로 진행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팬들의 반응과 해석을 살펴보고 피드백하면서 차후 다른 뮤직비디오에 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