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페디의 성원모 감독은 2007년부터 지금까지 300여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의 정서를 적절히 활용한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 지상파 방송 금지 판정으로 화제였던 오렌지캬라멜의 <까탈레나>, 국내 최초로 세로 비율로 촬영해 화제를 모은 에픽하이의 <Born Hater>, <Break>를 비롯한 빈지노의 뮤직비디오가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이달의 소녀, 러블리즈 등의 데뷔 시절을 함께하며 K팝 아티스트들의 각기 다른 특징을 포착하고 그들만의 세계관을 유려히 펼치는 솜씨는 디지페디가 가진 독보적인 강점이다.
-16년간 업계에서 일하면서 어떤 변화를 체감했나.
=중요한 분기점이 있었다. 2010년을 전후로 캐논의 EOD 5D Mark II가 나오고 중국의 각종 스테빌라이저 장비가 상용화됐던 때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영상 제작 시간이 줄고 투입되는 푸티지 수가 대폭 늘어났다. 콘텐츠의 질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무엇보다 LTE, 4G 시대가 되면서 스마트폰을 통한 영상 시청이 대중화된 것이 중요한 기점이 됐다. 이러한 변화들이 맞물리면서 2015년경 K팝 산업이 부흥했다. 산업 규모가 커지다 보니 수많은 작품이 쏟아져나왔고 K팝 비디오의 성공 공식들도 등장했다. 다들 정답지를 아는 상황이 되니까 오히려 창작자들의 표현 범위는 줄어드는 경향이 생겨났다.
-K팝 비디오의 성공 공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신우석 돌고래유괴단 대표가 뉴진스의 뮤직비디오 제작을 의뢰받았을 때 나에게 연락했다. “걸그룹 비디오를 작업하자는데 이게 뭐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더라. 내 대답은 요즘 K팝 비디오가 거의 마당놀이나 가부키 같다는 거였다. (웃음) 특유의 양식이 있다는 소리다. 정형화된 플롯이 있고 해야만 하는 연출이 정해져 있다. 한때는 큰 기획사 한곳이 제작 규칙을 문서로 공유했다고까지 알고 있다. 1절 코러스의 첫 장면은 반드시 얼굴 클로즈업이어야 하고, 군무 장면은 반드시 광각 로 앵글로 찍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신우석 감독과의 일화를 더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 내가 신 감독에게 건넨 대답도 공식들을 신경 쓰지 말고 작업했으면 좋겠단 말이었다. 기존 양식을 깨는 시도가 당연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K팝 업계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정답처럼 떠도는 방식대로 만들지 않더라도 성공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길 바랐다.
-K팝의 글로벌화는 K팝 비디오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국내 혹은 해외, 어느 시장을 표적으로 삼는지에 따라 영상의 방향성이 달라진다. 국내 팬은 대체로 얼굴 클로즈업을 좋아하고 해외 팬은 군무 장면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가사를 곧바로 알아들을 수 없으니 몸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거다. 또 세계관이나 서사적인 측면은 해외에서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국내 팬들보단 아티스트의 자체 콘텐츠나 미디어 출연을 항상 챙겨 보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소위 말하는 ‘덕질 떡밥’을 비디오 내부에서 더 열심히 찾게 된다.
-러블리즈, 이달의 소녀 등 아티스트의 시작을 함께하며 그들이 어떤 그룹인지 차별화된 비주얼로 보여주는 작업을 많이 했다. 어떤 팬덤은 디지페디를 그룹의 ‘아버지’로 칭하기까지 한다.
=바라는 방향성이다. 그룹의 색깔을 일관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영상 감독도 긴 호흡으로 함께하는 게 좋다. 물론 직업의 안정성을 위해서도 좋다. (웃음) 재미도 더 크다. 내가 이 그룹의 캐릭터나 브랜드를 빌드업한다는 만족감이 있다. 이달의 소녀와의 작업은 뮤직비디오로도 대하드라마 같은 장편 시리즈를 만들 수 있다는 선례가 돼서 뜻깊다. 오렌지캬라멜 3부작(<까탈레나> <나처럼 해봐요> <강남거리>)도 재밌었고, 빈지노나 에픽하이와의 작업은 유명한 만큼 잘했던 것 같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세계관 뮤직비디오들은 워낙 잘 나왔고, 펜타곤의 <청개구리>도 기억에 남는다. 되돌아보니 다 잘했던 것 같다. (웃음)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Magic Island>나 <Eternally> 비디오는 러닝타임이 14분, 20분에 달한다. 과거엔 대중가요와 영화 서사의 형식이 다른 까닭에 두개가 아예 다른 매체라고 말했다. 서사가 중요해지고, 영상 길이도 늘어난 지금의 K팝 비디오는 영화와 비슷해진 것일까.
=영화랑 비슷하게 만든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보단 K팝 비디오의 외양을 다방면으로 확장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K팝 비디오의 목적은 곡을 홍보하는 것이 아니다. 아티스트의 입체적인 브랜딩에 가깝다. 영상의 서사성이 짙어지고 길이가 늘어날수록 조회수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요 기획사들은 조회수보단 그룹의 내실을 단단하게 키우는 일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콘텐츠 자체의 이야기나 완성도보다 그룹 브랜딩에 집중한다는 면에서 K팝 비디오가 영화적이어야 한다는 발상이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한편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별의 낮잠>을 보면서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을 언급하는 등 디지페디 특유의 영화 오마주를 재밌게 보는 시각도 많다.
=재밌다고 말해주니 다행이다. K팝 비디오는 늘 새로운 시각적 재미를 줘야 하는 콘텐츠이므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모티브를 여기저기에서 가져온다. 그룹의 세계관과 비슷한 뉘앙스의 레퍼런스를 쓰기도 한다. 이를테면 에이티즈의 <Guerrilla> 아트워크에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포스터를 참고했다. 영화가 그룹의 이미지, 스토리텔링과 유사점이 많은 만큼 팬들에게도 좋은 즐길 거리가 됐다. 원래라면 안 봤을 작품도 더러 보게 된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0X1=LOVESONG (I Know I Love You)> 일본 버전 비디오를 만들 때는 일본 특유의 감성을 구현하려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다시 보거나 <너의 이름은.>과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본인의 취향을 영상물에 가미하는 재미가 커 보인다.=뮤직비디오와 K팝 비디오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기도 하다. 감독의 재량권이 큰 편이다. 영상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획사가 통제하는 경우는 없다. 반면 광고계는 광고주측의 요구가 강하다. 다른 영상 업계도 대개 마찬가지다. 물론 재량권이 보장된다고 해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영상을 만드는 건 아니다. 가령 에이티즈의 프로젝트를 맡았다면 ‘이 팀이 북미권에서 인기가 많구나. 통상적인 K팝보단 강렬하고 힘 있는 컨셉이구나’라는 조사를 거친 후에 그룹 이미지와 소비 패턴에 맞는 비디오를 만드는 거다. 의뢰인과 수용자의 니즈를 퍼즐처럼 맞추는 일에 감독이 충분한 재량권을 갖고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감독뿐 아니라 K팝 비디오의 작곡가, 출연자들은 다른 분야보다 열의가 넘치고 경쟁심도 크다. 업계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만 최근에는 젊은 감독들의 재량권이 축소되면서 천편일률적인 뮤직비디오가 만들어진다거나 제작비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등 여러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