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의 <Pathcode> 티저 작업으로 K팝 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VM 프로젝트 범진 감독은 엑소의 <CALL ME BABY> <LOVE ME RIGHT>, 레드벨벳의 <Dumb Dumb>, 블랙핑크의 <휘파람>, 세븐틴의 <울고 싶지 않아> 등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다. 그렇게 메인 스트림에서 작업한 뮤직비디오만 어느덧 200편 이상이다. 과감한 컬러 매칭과 조명, 시청자의 적극적인 해석을 유도하는 다양한 메타포를 감각적으로 녹여내기로 정평나 있는 그의 영상은 사진, 광고, 다큐멘터리,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등 다방면으로 뻗어 있는 커리어에 뿌리를 둔다.
-엑소의 <Pathcode> 티저를 시작으로 K팝 비디오 작업을 활발하게 하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 그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원래는 사진 및 디자인 일을 쭉 했다. 22~23살 때쯤 우연히 광고 공모전에 나가면서 프리미어 같은 편집 프로그램을 처음 접하게 됐다. 이후에도 계속 영상을 만들었고 개인적으로 만든 자전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아디다스, 프레드페리 같은 스포츠 브랜드에서 연락을 주면서 커머셜 광고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 위너와 아이콘 멤버들이 출연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 <WIN: Who is Next?>의 프로모션 영상, 프레드페리에서 지원하는 인디 밴드 뮤직비디오 제작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다 민희진 현 어도어 대표에게 제안을 받았다.
-광고 영상을 만들다가 K팝 아티스트가 주인공인 뮤직비디오 작업을 해보니 어떤 점이 가장 다르던가.
=광고에서 중요한 것이 판매되어야 할 제품이라면, 뮤직비디오는 기본적으로 음악이 본질적인 뼈대가 된다. 음악이 가진 힘을 더 극대화할 수 있는 영상, 음악과 영상의 앙상블이 중요하다. 듣기만 했을 땐 다소 실험적으로 다가왔을 음악도 비주얼을 통해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다. 다시 음악을 들으면 뮤직비디오에서 봤던 비주얼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청취자가 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전에 애니메이션과 그래픽 디자인, 사진 등을 골고루 공부했던 이력이 K팝 비디오를 만드는 데 미친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총괄 제작부터 기획, 촬영, 편집, 컬러 그레이딩까지 직접 할 수 있는 이유가 그런 배경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연출한 뮤직비디오에 어떤 타이포그래피가 들어가는 게 좋은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안다. 과거 그래픽 디자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 터득했던 방식을 영상 작업에도 녹여내고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촬영, 구도, 색감에 대해 배웠다.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미술이다. 캔버스라는 프레임이 화면으로 바뀌고 움직이게 됐을 뿐 근본적으로 영상 작업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습작까지 합치면 지금까지 500편 정도의 영상 작업을 했다. 처음 영상 작업을 시작했을 때 주변에 물어보면 프로덕션에 들어가 막내 생활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업계 관행과 시스템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맨땅에 헤딩하듯 1인 프로덕션을 시작했다. 가상의 편집을 미리 해놓고 그에 맞춰 영상을 찍기도 하고, 촬영한 영상을 모두 프린팅한 뒤 종이로 오려서 작업한 적도 있다. 그렇게 제약 없이 작업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엑소의 세계관은 원래 12명의 멤버를 가정한다. 갑작스럽게 2명의 멤버가 팀을 나간 뒤 기존 세계관을 재정립하는 <Pathcode> 티저를 만들 때 어떤 고민이 있었나.
=기본적으로 탈퇴한 멤버들이 갖고 있던 두 가지 초능력이 배회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이를 마주한다는 설정을 잡았다. 그 전해 시상식에서 공개했던 프로모션 비디오에서 12개의 구슬 중 두개는 미로를 탈출하지 못하는데, 마치 두 멤버의 탈퇴가 이미 존재했던 스토리처럼 보이게끔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세계관이 허무맹랑하지 않고 있을 법하다는 현실감을 주고 싶었다. 엑소플래닛에서 온 멤버들이 각기 다른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설정엔 비현실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에 <Pathcode>는 그들의 능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슈퍼히어로영화에서 자신도 모르게 힘이 발현되어 자각하는 영상을 많이 참고했다.
-개인적으로는 NCT U의 <일곱 번째 감각>이 보여준 과감함을 좋아한다. 세계관과 시스템이 견고한 그룹의 데뷔곡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연출자의 독창적인 해석이 많이 가미된 작품이었다. 태민의 <Press Your Number>와 <Drip Drop>이 보여준 시네마틱한 연출도 기억에 남는다.
=예전엔 밝게 투사한 화면에 아티스트의 얼굴을 뽀얗게 보여주는 식의 K팝 뮤직비디오가 많았다. 당시 내 생각은 ‘왜 그래야만 해?’였다. 가수가 멋있고 매력적인 것은 누구나 안다. 그래서 <일곱 번째 감각>은 처음부터 미리 붉은 톤으로 갈 거라고 말했다. 조명도 인물에게 직접 쏘지 않고 뒤쪽으로 투사했고, 그 빛이 반사되어 다시 얼굴로 넘어오게끔 했다. 태민씨는 솔로 활동을 할 때 본인이 직접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스타일이다. <Press Your Number>와 <Drip Drop>은 영화적으로 작업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전반적인 스토리와 캐스팅, 인트로와 아웃트로, 마지막 크레딧까지 단편영화 같은 미장센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가령 <Drip Drop> 퍼포먼스 비디오를 촬영한 배스퀘즈 록은 <스타트렉> 시리즈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K팝이 글로벌 시장에서 주류가 된 데는 음악 이상으로 영상의 힘이 컸다.
=내수 시장이 탄탄한 J팝과 달리 K팝은 기본적으로 글로벌을 지향한다. 한국 고유의 음악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서구적인 팝에 가깝지도 않다. 내가 만드는 영상도 화면에 시대적, 지역적 특성을 직접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다. 과거인지 현대인지 미래인지, 한국인지 해외인지 알 수 없는 시공간을 구성한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 K팝이 높은 인기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자 하는 태도다. 한국 소비자들은 전세계에서 누구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빨리 접하고 한번 살 때 후회 없이 사고자 하는 기질이 있기 때문에 콘텐츠를 보는 눈도 엄하다.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려면 기본적으로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한다.
-현재 영상산업에서 K팝 비디오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K팝 비디오는 아티스트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끔 하는 뼈대를 잡아주는 청사진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안에서 서사가 완성되지만, 뮤직비디오는 어떠한 사건에 대한 서사를 완성할 뿐이지 그 가수의 전체 스토리를 완결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끝나지 않는 서사의 일부를 구성하는 개별 에피소드에 가깝다.
-이를테면 아이유라는 아티스트가 가진 긴 서사에서 <삐삐>와 <Celebrity> 뮤직비디오가 각각 차지하는 스토리가 있다.
=<삐삐>는 자신에게 선을 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위트 있게 옐로 카드와 레드 카드의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했다. 그래서 노란색으로 보이던 화면이 천천히 빨간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Celebrity>는 대중이 받아들이는 가수로서의 아이유, 마이너한 감성을 가진 이지은이 각기 살고 있는 도플갱어처럼 보이길 바랐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다른 종류의 작업이 있는지.
=지금까지 했던 작업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었다. 오리지널 스토리로 주체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 영화 시나리오를 두세편 쓰고 있는데 올해 안에 캐스팅을 진행하는 것이 목표다. 파일럿 비디오를 먼저 만든 후 이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접근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