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반희수는 어디에 남아 있을까: 김병규 평론가의 K팝 뮤직비디오 비평
2023-02-09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왜 K팝 뮤직비디오에 비평적 주목이 필요한 걸까. 세계적으로 열광하는 새로운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건 글로벌 플랫폼으로 유통되는 OTT 시리즈가 영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매체가 될 거라는 주장만큼이나 미심쩍은 산업의 시각일 뿐이다. 대중의 열광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그 열광의 단면에 비평이 개입할 공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맥이 요구되는 문제다. 영화비평의 습관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영화적인 이미지를 탐내고 영화와 닮아가는 뮤직비디오의 외형과 제작 구조를 성급히 ‘영화처럼’ 해석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다른 매체와 영화가 특정한 관습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특수한 사태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영화에도, 뮤직비디오에도 유의미한 의견을 제공하지 않는다. 동시대 뮤직비디오의 위상은 단순히 시대가 열광하는 대중문화의 상징으로도, 영화를 비롯한 영상예술과 닮아가는 미적 작업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거기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는가. 앤 캐플런은 탈역사화된 미적 기호들로 조각난 뮤직비디오 이미지가 아방가르드와 상업주의, 가공된 광고 이미지와 드라마의 비전을 불투명하게 혼재하고 있으며 수용자에게 분열된 관객성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MTV 시대의 뮤직비디오를 분석한 캐플런의 견해를 유튜브와 스마트폰에서 재생되는 K팝 뮤직비디오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캐플런이 지적한 뮤직비디오 안팎의 불투명하고 분열된 정체성의 혼재가 오늘날의 뮤직비디오 지형에서 만드는 쪽과 수용하는 쪽을 오가며 더욱 복잡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은 별다른 부연 없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해졌다.

채워지지 않은 빈칸

K팝 문화에 대한 몰입이 전제되지 않은 채로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탁월한 결과물이라 상찬하는 것은 핵심을 겉돈다. 특정 집단을 비꼬거나 특권화하려는 말이 아니다. 이제 뮤직비디오는 단독적인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도로 양식화된 K팝 뮤직비디오는 팀의 색깔에 맞춰 앨범과 컨셉을 기획하는 제작자, 영화와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참조해 뮤직비디오를 구체화하는 연출자, 그 화면에 출연하는 아이돌 그룹, 조각난 기호들을 맥락에 맞게 끼워 넣는 감상자들의 유희가 뒤얽힌 상호교환의 무대가 되었으며 언제나 이런 회로와 함께 작동한다. 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K팝 뮤직비디오는 촬영 단계의 비하인드 영상, 공개 직후의 리액션 비디오와 함께 놓인다. 오늘날의 뮤직비디오는 그것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수용하는 다양한 협력들과 결탁하고 있다. 최근 화제를 모은 뉴진스의 <Ditto>와 <OMG> 뮤직비디오를 둘러싸고 나온 분석들은 뮤직비디오의 실질적인 참여 비중과 무관하게 제작자인 민희진과 각본과 연출을 맡은 돌고래유괴단과 그들의 기획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뉴진스라는 아이돌 팀의 정체성 사이를 넘나들며 결과물에 새겨진 성취의 주체를 지목하고 있다.

그것은 이례적이긴 하지만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뮤직비디오의 현대적 위상을 검토하는 스티븐 샤비로의 지적처럼 디지털 뮤직비디오는 사회적 생산물이 순환하는 단계와 절차를 드러낸다. 뮤직비디오는 기존의 문화적 기호를 샘플링하고 변주하면서 전과 다른 이미지와 사운드를 덧씌우고(여러 영화적 참조물을 각 멤버의 캐릭터에 맞춰 차용하는 트와이스의 <Cheer up>은 그 통속적인 예시일 것이다) 그 자리에 놓이는 이들에게 순환적 주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동시대 뮤직비디오에 대한 몰입은 분열된 형식과 주체 사이의 간극을 채우려는 적극적인 해석 과정을 포함한다.

<Ditto>에서 캠코더를 든 인물 ‘반희수’는 이처럼 애매하게 뒤얽힌 주체들이 기입되고 사라지는 임의의 빈칸으로 고려할 만한 모델이다. 뮤직비디오 전체를 통틀어 한번도 제대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 인물은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인 뉴진스의 학창 시절 친구로 설정된 출연자이면서, 테이프에 기록된 영상을 사후적으로 재생하는 회고의 주체이자 캠코더를 들고 그들의 영상을 담아낸 기록자이기도 하다. 또한 반희수는 유튜브 채널 <Ban Heesoo>의 보이지 않는 게시자로, 후속으로 공개된 <OMG>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에 “희수야, 전화 좀 받아”라는 편지 속 흔적으로 남겨져 있다. 반복건대, 이토록 복잡한 정체성으로 묶여 있는 반희수는 채워지지 않은 빈칸이다. 그는 뮤직비디오가 구축한 세계에 이입하도록 이끄는 가상의 동질적 공간이면서 캠코더와 VHS 테이프라는 시각적 형식을 도입하는 무대장치다. 이 뮤직비디오의 핵심적 아이디어와 연출과 연기는 반희수라는 표면을 매개로 작동하고 실현된다.

<Ditto>가 현실의 맥락이 탈각된 시공간(그들은 대체 언제, 어느 지역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걸까, 혹은 반희수는 지금 어디에서 테이프를 재생해 과거를 회고하는 걸까)에 새겨진 공동체적 기억을 공유한다면, 반희수라는 투명한 표면은 그 자리에 현실적인 정서를 마련하고 되비춘다. 뮤직비디오가 재현하는 기억의 질감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질감의 기억이지만, 그 정서에는 무리 없이 진입할 수 있다. <Hype Boy>와 <Attention>에서 미국 하이틴풍의 이미지로 구축된 소녀들은 <Ditto>에서 소피아 코폴라적인 무드를 입고 한국과 일본의 몇몇 학원물에 걸쳐 있는 기억을 재현한다. 그 자리에 우정과 자기애,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친밀감, 설익은 에로티시즘을 동반한 유토피아가 형성된다. K팝 뮤직비디오는 특정한 맥락에 단단히 귀속되지 않는 기호들을 결합해 병적인 망상을 탄력적으로 비틀어 향수 섞인 기억으로 수용한다.

판타지라는 정당화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현실적인 정서를 은폐한다. 이 지점에서 발견되는 것이 있다면, 아이돌의 이성애적 욕망을 은폐하는 K팝의 유구한 규범과 도착적 섹슈얼리티를 은밀히 강조하는 뮤직비디오의 시청각적 관습의 이질적인 충돌이다. 영화적 드라마의 관습을 따른다면, <Ditto>에서 남학생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뉴진스 멤버 가운데 한명인 편이 자연스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체해 남학생과 첫사랑의 열망에 빠지는 건 망상에 사로잡힌 반희수다. 어째서인지 뉴진스의 전작 <Hype Boy>나 <Attention>에서 서양 소년들과의 이성애적 상상은 허용되지만, <Ditto>에서처럼 같은 국적의 또래 배우와의 이성애적 묘사는 금기시된다. 이 차이를 상투적인 해석으로 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중간에 억압적 규범을 짊어지면서도 매혹적인 춤과 노래를 드러내야 하는 아이돌의 신체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아이돌의 몸은 모순적인 두 규칙에 붙잡혀 전복적인 나르시시즘과 오인된 퀴어성을 산출하기도 한다). 그들은 근사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욕망을 은폐하고 과거에 찍힌 영상에 머무는 상태로 아름답다.

성애를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가 금기시된 세계는 지극히 나르시시즘적(아이브의 <Love Dive>)인 정서에 사로잡히거나 바깥과 단절된 병리적 망상(뉴진스의 <OMG>)을 공유하는 무대로 전환된다. 그것이 K팝 뮤직비디오가 추구한 세계의 한 가지 이미지다. 이쯤에서 비디오를 끄고 현실로 돌아와 말한다면, K팝 산업과 그 수용자들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그 예쁘고 어린 대상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또 미친 듯이 미워해왔다. 이는 현실의 맥락이 배제된 미적 기호들로 난무하는 뮤직비디오의 판타지 공간을 빌려 걷잡을 수 없이 강화되고 정당화된다. K팝 뮤직비디오 이미지는 현실의 결여와 부재를 기록한다. 물론 판타지에 책임을 물을 순 없다. 하지만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고, 어떤 현실적 문제로부터도 벗어난 듯한 ‘예쁜 것’에 사로잡힌 취향은 언제나 자본에 대한 두터운 선망을 부른다. 어린 나이부터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인재를 길러내던 시스템은 타고난 분위기와 금수저, ‘갓기’와 ‘뼈말라’를 발명하고 ‘부내’나는 음악과 프로모션으로 그 가장된 종족성을 치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종족성을 무람없이 과시하는 뮤직비디오는 K팝이 건네는 매혹의 중핵이면서 동시에 이 산업이 어떻게 도착적으로 변해왔는지 드러내는 다큐멘터리적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Ditto>의 반희수가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이 기록이 끝났을 때 그는 어디에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