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은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호평받았고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영화 1위에 뽑혔다. <씨네21>에서도 물론 다수의 평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캠코더에 보존된 유년기의 기록을 매개로 아버지와 동행한 오래된 휴가의 기억을 불러내는 이 영화에 쏟아진 전세계의 찬사는 보편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작은 비디오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대상에 이토록 몰입하게 만드는 시선의 힘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는 소감을 남긴 클레르 드니의 말처럼, <애프터썬>은 내밀한 기억을 통해 뒤늦게 체감되는 감정과 그것에 접속하게 하는 영화적 회상의 매혹을 짚는 환대 섞인 감상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종류의 불만을 품고 있는 편이다. <애프터썬>이 형편없는 영화는 아닐 테지만 동시대 예술영화의 고착된 문제를 드러내는 한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많은 장면에서 표준화된 예술영화가 의존하는 진부한 전략이 대안적 형식이라는 미명하에 돌출되어 있다. 적잖은 평론에서 그것을 탁월한 영화적 효과로 받아들이고 찬사를 보내지만,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애프터썬>이 전하는 내용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대신 이 영화가 구사하는 형식적 전략과 효과가 과연 흔쾌히 호평할 만한 것인지 의심스럽게 되묻고 싶다.
돌출된 미적 전략
<애프터썬>에는 두 차례 반복해서 제시되는 상황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온 뒤 중반부에서 다시 반복되는 그 장면은 캠코더를 든 소피가 아버지 캘럼에게 장난스럽게 질문을 건네는 순간이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이 순간은 소피가 촬영하는 캠코더 화면으로 묘사되지만, 뒤에서는 탁자를 향해 고정된 앵글에 텔레비전에 비친 소피와 캘럼의 반영된 이미지로 변형돼서 나타난다. 첫 장면에 쓰이고 다시 한번 반복될 만큼 주의 깊게 강조되는 이 장면의 구도는 <애프터썬>이 구축한 미적 전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는 다수의 장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이의 손에 쥐어진 캠코더, 느닷없이 던져지고 나서 뒤늦게 밝혀지는 상황의 의미, 텔레비전에 반영된 이미지로 이어지는 롱테이크. 이런 효과에 그 자체로 문제 삼을 부분은 없다. 하지만 <애프터썬>은 많은 장면에서 지적인 인식을 유도하기 위한 구도와 배치가 언제나 인물들이 직면한 상황에 앞선다. 이 장면의 생김새는 언뜻 심오한 연출의 결과물로 받아들여지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고전적 데쿠파주를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연출자의 자의식을 드러낼 뿐이며 화면 내에서 충분히 활용되었어야 할 인물의 시선과 동작을 무시한 결과와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다. 소수의 관객과 비평가들이 알아보도록 노골적으로 조율된 장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장면에 설계된 장치를 인지하고 해독하는 절차다. 이 순간, 인물의 심리적 상태와 숏의 활동을 억제하고 의미를 설계하려는 감독의 흔적이 스크린 위로 불필요하게 묻어나온다.
이처럼 장면을 형성하는 구조적 장치들이 숏의 표면을 장악하는 가운데 지워지는 것은 샬롯 웰스가 수행했어야 하는 ‘연출’이라는 문제다. <애프터썬>이 기록장치를 매개로 아버지와 딸이 공유한 기억을 돌아보는 영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캠코더와 꺼진 TV에 비친 인물의 형체와 플래시백이라는 전제가 동원되는 것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장면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 완료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구체적인 숏의 세부로 만들어내기 위해 영화가 마련하는 연출의 방법으로 어떤 것들이 실천되고 있는가?
<애프터썬>이 취한 미적 형식에는 바로 그 구체적인 연출의 방법이 희미하다. 속되게 말한다면 <애프터썬>은 장면을 구상하는 개념적 도식이 큰 비중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데 비해, 연출자가 어떻게 연기를 지도하고 동선을 짜고 배우들의 시선과 동작을 조정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영화다. <애프터썬>에서 장면의 쓸모와 의미는 특정 위치에 사물이 놓이고 인물이 자리 잡을 때 일찌감치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영화에서의 연출이라기보다 낡은 사진적 배치에 가까울 것이다. 샬롯 웰스는 캠코더 화면의 물질성, 주체와 시점이 모호한 플래시백, 반영된(reflection) 이미지라는 숏의 미적 디자인에 의존하면서 화면 내부를 밀도 있게 운용해야 하는 연출의 업무를 방치한다.
연출자의 역할이 현장에서 연기를 지휘하고 장면의 길이를 조절하는 업무에 있다는 고전적 문제의식을 고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앤디 워홀의 <잠>과 <키스>, 또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파이브>처럼 장면의 긴 지속 시간을 받아들여 개념적으로 설계된 형식과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적 사건을 결합한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의 작업은 연출자가 촬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탁월한 ‘연출’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명제를 급진적으로 증명해낸다(워홀은 종종 자신의 촬영 현장을 벗어났으며,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를 찍는 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프터썬>이 의존하는 숏의 개념적 전략은 설정된 장면의 목적에 가닿는 것도, 예기치 않은 우연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렴풋하게 뭉뚱그려진 미적 조합으로 완결된 의미를 방사할 뿐이다. 두 차례 반복되는 소피와 캘럼의 대화 장면에 연출자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희박하기 짝이 없다.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이 장면을 포함해 <애프터썬>의 많은 장면에서 ‘연출’을 발견하지 못했다. 숏이 겨냥하는 바는 결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 불확실한 면모가 개입할 여지는 현저히 적다. 대신 심미적 프레이밍을 위해 인물의 움직임을 철저히 억제하고, 장면에 담기는 정보나 변화에 비해 숏의 지속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관성적인 호흡이 주어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 구체적 감각은 언제나 보편적 수준의 일반화로 휘발된다.
무균실로서의 시공간
잘 거론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애프터썬>에서 적극적으로 환기되는 정서 가운데 하나는 유년기의 성적 긴장감이다. 소피는 화장실 열쇠 구멍 사이로 전날 있었던 성행위에 대해 떠드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영장에서 밀접하게 서로를 만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밤중에 게이 커플이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낯선 성적 체험이 소피의 시야에 침입하는 순간들은 영화 전체를 감싸는 긴장을 충전하는 과정이기도 해서, 소피는 우연히 마주친 또래 남자아이 마이클과 밤의 수영장에서 키스하기에 이른다. 도발적인 독해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소피의 시선에 포착되는 성적 긴장이 소피와 캘럼이 함께 있는 장면에도 침범하고 있으며,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고 손을 붙잡는 장면의 질감에 근친상간적 긴장을 부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애프터썬>의 기록엔 레즈비언 커플로 부모의 입장에 선 소피가 실현되지 않은 유년기의 불온한 에로스를 되돌아보는 시선이 결부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문제적인 면모는 편재하는 성적 긴장이 아니라 그것을 미심쩍은 방식으로 억제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무균적 시공간을 내세우는 것이다. 소피와 캘럼이 머무는 호텔과 그 주변은 문자 그대로 청결하게 세공된 무대다. 이곳에선 소피와 조금이라도 관련 맺지 않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는 카메라에 보이지도, 마이크에 채집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공사 중인 호텔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도 노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소피와 캘럼의 근처를 맴돌아야 한다. 두 사람의 눈과 귀를 자극하지 않는다면,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어린 시절 기억을 빌려 펼쳐지는 시공간이라는 절대적 전제로 모든 현상을 회피할 순 없다. <애프터썬>이 소피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공간은 낯선 타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인 풍경이 되어버린 세계다.
더 나아가 영화는 소피가 다른 사람과 만나며 겪는 (성적 긴장과 결부된) 불안과 위협마저도 철저히 차단한다. 이를테면, 캘럼과 다투고 나서 한밤중에 길을 잃은 소피가 마이클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마이클은 함께 있는 남자아이 무리를 가리키며 소피에게 “우리랑 놀래?”라고 제안한다. 혼자 밤거리를 배회하는 여자아이와 그에게 접근하는 여러 남자아이들의 모습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촉발하게 한다. 더군다나 소피는 지금 캘럼과 떨어져 있다. 그를 지켜줄 유일한 보호막이 사라진 듯한 위태로움이 더해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수영장에서 키스하는 소피와 마이클 단 두 사람의 모습이다. 이 경험은 불안하지도, 특별한 인상으로 남지도 않는다. 유년의 소피는 아무런 굴곡 없이 31살의 레즈비언 소피가 될 것이다. 이곳은 일탈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공간이라는 듯 불길한 예감은 회피되고 소피는 침대에 잠들어 있는 캘럼에게로 돌아간다. 성적인 유혹과 불안정한 일탈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버지가 느끼는 위태로운 감정에(만) 정확히 접속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설정한 서사적 기획이므로 다른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샬롯 웰스는 타인의 불순한 흔적이 지워진 도착적인 무대를 그려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공된 영화적 무대의 기능이 노출된다. 주관적 기억에서 출발해 보고 들은 적 없는 순간까지도 플래시백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는 <애프터썬>의 기록은, 개인이 간직한 기억의 부피를 초과해 타인에게 접속하고 비로소 아버지라는 거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는 여정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비추는 공간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오직 소피와 캘럼, 두 사람의 감각으로만 수렴되는 영화적 지각의 수축성이다. 그들 바깥에는 위협적인 기억도, 세상의 잡스러운 소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프터썬>이 과거에 발견하지 못했던 인식을 넓히려는 시도라면, 현실의 공간을 주변화하면서 세공된 무대 바깥의 얼굴과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하는 형식은 기만적이다. 웰스가 세운 미적 전략은 여기서 다시 한번 심미적으로 자족하는 장치일 뿐, ‘연출’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니, 더 나아가 영화가 시도하는 ‘연출’을 훼손하는 독립적인 장치로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노출해버린다.
장면의 미적 전략이 영화 내에 잠재하며 서로 다른 숏들과 일관된, 또는 의도적으로 불화하는 구성을 이루는 대신 그 자체로 영화를 규정하는 실체적인 조건으로 나타날 때, 그것을 조정하는 감독의 터치는 작품 속 세계를 부자연스럽게 왜곡하는 덧칠이 된다. 나는 <애프터썬>을 보면서 스크린에 떠오른 장면을 지켜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장면들이 개념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거듭해서 받았다. 자율적 활동이 억제된 숏은 빈곤한 개념에 붙잡힐 수밖에 없다.
전신 마비에 걸린 영화
존 부어먼은 언젠가 장 뤽 고다르가 전해준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다르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만들려면 젊고 무식해야 한다. 우리만큼 많이 알면 영화 만들기는 불가능해진다.’ 고다르의 말은 연출자가 모든 문제를 예견할 수 있으면 결국 전신 마비만 일으킬 뿐이라는 뜻이었다.” 존 부어먼과 샬롯 웰스는 일견 어떤 접점도 없는 연출자 유형처럼 보이지만, <애프터썬>을 보고 나오면서 즉각적으로 떠올린 것은 부어먼이 언급한 영화의 전신 마비라는 비유적 상태였다. <애프터썬>의 정적인 장면들은 시적이고 아름답다기보다는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영화가 해결해야 할 특수한 주제나 역학을 구현하는 데서 발생한 사태가 아니라 연출의 방기에서 오는 무성의한 화면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부연할 필요도 없다. 샬롯 웰스라는 이 젊은 감독은 그럴듯한 외형으로 치장된, 그러나 지나치게 유식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유식함이란 동시대 예술영화가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고 어떤 유형으로 옹호받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심술궂게 말하자면, <애프터썬>은 주류영화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주제와 정서를 서툴게 감추면서 가장된 저항의 형식을 취해 보는 이들을 지적으로 호객하는 예술영화의 욕망을 드러낸다.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짐짓 대안적인 형식을 구현하는 것처럼 구는 이중의 열망이 이 영화의 설계도에는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다(과거였다면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를 모으는 영화들에서 쉽게 보이는 욕망과 감수성이라 치부할 만한 이런 경향은, 이제는 칸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로카르노에서도 토론토에서도 무사히 환대받을 것이다). 영화의 정해진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종합적인 체계를 이탈해 다른 형식을 제안하던 지난 세기의 시도를 통속적으로 ‘예술영화’라 불렀다면, 오늘날 그 명칭은 부지런하게 정해진 규칙을 따르고 호평받는 영화적 표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패턴화된 규범으로 의미를 옮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동시대의 ‘작가’와 ‘예술영화’라는 표현의 쓰임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신작’이 유통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애프터썬>은 동시대적 예술영화의 양식에 철저하리만큼 충실한 작업이다. 이는 첫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에겐 깊은 오명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