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저 웃음 소리를 지켜주고 싶어. 나 혼자서 이 세상을 구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다시 돌려받은 이 힘 진짜 제대로 쓰고 싶어.”(<힘쎈여자 도봉순>)
본질과 비본질 사이에서
- 그때의 결정에 자부심과 자긍심이 느껴져요.
= 그게 제 철학이고 가치관이니까요. 저는 멋지고 뛰어난 사람보다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는 약자에 더 마음이 가요.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다는 생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담아내려 해요. <품위있는 그녀>의 박복자(김선아)도 그랬고, <마인>의 강자경(옥자연)이 그랬죠.
- 아무래도 그러한 연민과 이해가 작가님이 글감을 찾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큰 힘이 되는 거겠죠?
= 맞아요. <힘쎈여자 도봉순>도 힘센 여자보다는 약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봉순이(박보영)가 키가 작고 고졸이잖아요. 언더도그죠. 그런데 세계를 정복하는 고졸인 거예요. 그건 저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어요.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거든요. <품위있는 그녀>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가난했던 여자의 비루한 삶을 그리는 시선이 있고 <마인>에서도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나오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세상이 좋아요.
- <힘쎈여자 도봉순>이 방영된 2017년에는 정통 로맨스가 각광받던 시기였어요. 여성 히어로의 등장에 많은 시청자가 환대했었는데요. 시기적으로 드물고 낯선 소재를 꺼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작가 일을 다시 하기 전에 한동안 학원을 운영했잖아요. 심지어 잘됐고요. 그래서 경제적 안정감이 있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작가는 돈이 없으면 하기 싫은 걸 쓰거나 좇아야 해요. 협상 테이블 앞에서 심적으로 비굴해지기도 하고요. 그러니 방송국 입장에서 저는 벤츠를 타고 다니는 신인 작가인 거예요. 마음의 여유가 있었죠. 그때만 해도 방송국 사람들이 신인 작가에게 모욕을 주던 좋지 않은 관습이 있었어요. 일종의 갑질이죠. 그런데 저는 그런 것에 끄떡도 않았어요. 그 덕에 남들이 바라는 것보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제가 잘하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죠. 누군가는 이 악습을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고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 그런데 과거의 드라마를 다시 보면 2023년 시점으로 달라 보이는 지점도 있어요. 예를 들어 <힘쎈여자 도봉순>의 경우, 철문도 쉽게 뜯어내는 괴력을 지닌 봉순이가 친구의 납치 사실을 알고 가장 먼저 한 건 남자주인공에게 찾아가 도와달라고 한 거였어요.
= 남자주인공에 의존한다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죠. 오히려 저는 그게 협업이라 생각해요. 안민혁은 재산도 많고 똑똑한 친구예요. 브레인이죠. 그런데 봉순이는 머리가 나쁜 대신 힘이 아주 세요. 그래서 둘이 공동의 목표를 두고 함께 공조해나가는 거예요. 저는 상생과 병립의 가치를 믿기 때문에 그 점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 작가님은 극중 PPL을 자연스레 배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어떤 작품은 과도한 PPL 때문에 조명되기도 해요. 이 과정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 같아요.
= 드라마는 굉장히 많은 사람의 이권이 합쳐져 있어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죠. 사실 큰 제작비를 쉽게 받으면 문제가 없을 텐데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저는 정말 협조를 잘하는 편이에요. 제가 비즈니스를 오래 했기 때문에 PPL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어요. 가능하면 제작사를 위해 PPL을 다 넣어주려 하고 있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도외시할 순 없으니까요. 다만 PPL도 규제가 있어서 일정 기준 이상은 못 넣어요. 안 그러면 광고 드라마가 될 테니까요. 제가 가장 잘하는 스토리텔링과 PPL의 기본 목적을 자연스레 합치시키려 해요. 본질만 흐트러지지 않으면 괜찮아요. 중요한 건 그거예요.
- <품위있는 그녀>에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기묘한 관계가 등장해요. 우아진(김희선)은 박복자가 위로받고 싶고 닮고 싶은 여성으로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둘은 남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에요. 적도 아니지만 완전한 아군도 아니고요.
= 쓰기 쉽지 않았어요. (웃음) 우리나라 드라마는 전형적인 도식을 갖고 있잖아요. 내 편 혹은 네 편. 그래서 시청자 반응도 응원하거나 응징하길 바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죠. 그런 현실에 박복자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던지고 싶었어요. 사실 누구나 마음속에 박복자가 있어요. 이루지 못한 꿈이나 가지지 못한 걸 욕망하죠. 그런 욕망이 없다면 우리가 어떤 동력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어요. 스스로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한 부분은 우아진이 마음 공부를 하며 유언장을 남기는데, 박복자가 죽은 뒤 그의 유품에서 우아진의 유언장이 발견되는 장면이에요. 그 유언장 내용도 결국 박복자의 삶과 죽음을 은유하거든요. 두 사람이 연결되는 순간인 거죠. 제가 봐도 잘 썼더라고요. (웃음) 사실 <품위있는 그녀>는 초반 편성이 잘 잡히지 않았어요. 중년 여자 둘이 나오는 드라마를 누가 보겠냐는 업계 반응이 대부분이었거든요. 하지만 다행히도 시청자 반응이 좋아서 그 뒤로 드라마 시장에 여성 서사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