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잃은 나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 그거예요. 마인.”(<마인>)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용기
- <품위있는 그녀>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된 이야기예요. 영풍제지를 모티브로 두었죠?
= 영풍제지 직원들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도 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어요. 아무래도 내부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해주지 않거든요. 영풍제지 이야기는 워낙 기사에 많이 나오고 온라인에도 정리된 글이 많아서 거기서 비롯한 이야기를 따온 거죠. 하지만 둘이 완전 다른 이야기이긴 해요. 박복자는 훨씬 더 입체적인 캐릭터에서 시작했으니까요. 박복자와 우아진, 다른 두 여자를 한데 연결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고 영풍제지는 소재와 배경으로서 흥미를 느낀 거예요. 배우들이 이 캐릭터들을 잘 연기해줬죠. 김선아가 아니었다면 박복자를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요.
- 대본 작업을 할 때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며 쓰잖아요. 내 그림과 가장 일치했던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 4부 엔딩에 박복자와 우아진이 처음으로 붙는 장면이 있어요. 비가 내리고 천둥도 치는데 폭주하는 박복자에게 우아진이 “여기서 멈춰!” 하고 소리를 질러요. 박복자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라고 대응하고요. 둘의 긴장감과 박복자의 표정, 우아진의 목소리까지.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연출까지도 완벽했다고 생각해요.
- <품위있는 그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게 <마인>이에요.
= 처음부터 <품위있는 그녀2>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에서 시작됐거든요. 같은 베이스와 같은 소재지만 조금 더 확장된 버전으로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제 한계를 분명하게 느꼈던 작품이라 아쉬워요. 결과적으로 불륜을 다루게 되고 혼외자가 나오잖아요. 다시 쓴다면 그렇게 안 쓰고 싶어요. 사실 모성을 조금 더 부각시키고 싶었어요. 이게 모성을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결의 맥락인데요, 드라마에서 키운 자식에 대한 모성이 나타나잖아요. 서희수(이보영)는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을 잘 키워서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고요. 이게 일반적 시선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거든요. ‘제 자식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싶잖아요. 강자경도 그 육아를 함께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정서현(김서형)도 자기만의 모성을 보여주죠.
- 그래서일까요. 편견을 싸워나가는 네 여성(미혼모, 새어머니, 성소수자, 빈곤층 여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이 바로 희수가 피를 흘리며 유산할 때예요.
= 모두가 아이를 잃은 서희수를 감싸는 장면은 제가 <마인>에서 제일 공들여 쓴 장면이기도 해요. 여자가 여자를 따뜻하게 감쌀 수 있는 포인트이기도 하죠. 가장 아픈 일이잖아요. 강자경도 거기서 같은 여자로서 아파하고 연민하고요.
- 특히 성소수자를 섬세하게 다룬 것으로 호평이 잇따랐어요. 성소수자가 현실과 타협하는 것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을 세세히 그리다 보니 오직 극을 위해 예민한 사안을 차용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아요.
= 그렇게 쓰지 않으려 정말 노력했어요. 또 다른 사랑의 형태로서 조심스레 다루려 했어요.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잖아요. 그런데 드라마가 조명하는 건 대부분 20대 남녀의 사랑이에요. 이상하지 않나요? 당장 이 아파트를 탈탈 털어도 50가지의 헤테로 연애담은 들을 수 있을 텐데. 저는 편견, 선입견, 차별 등과 싸우는 사랑을 더 많이 그리고 싶어요. 그래서 <힘쎈여자 강남순>에도 노인의 사랑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데,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이거든요. 많은 시청자가 원하는 게 아닐지라도 소수의 사랑을 말하고자 해요. 왜 노인들이 트로트만 보고 싶다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주인공이 된, 사랑 이야기도 보고 싶을 수 있잖아요. 저는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아요. 아무도 하지 않은 것, 시청률이 잘 안 나올까봐 머뭇거리는 것을 먼저 시도해서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다른 작가들을 위한 일이고 이 일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때문이기도 해요.
- 문득 궁금해요. 이렇게 많은 글을 써온 작가님에게 가장 글쓰기 편안한 환경은 어떤 상태인가요? 보통 작가는 올빼미족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 아우, 그럼 오래 일 못해요.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그때 에너지가 가장 좋아요. 다른 직장인처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루틴이 가장 맞아요. 밤 11시에는 자야 하고요. 주말에는 무조건 쉬죠. 해의 순환에 따라 일을 해야 몸이 건강해요. 몸이 건강해야 글이 잘 써지고요. 신이 인간에게 햇빛을 주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건강을 위한 필수 요소인데 심지어 공짜잖아요. 잘 이용해야죠.
나만의 글감을 얻는 방법
사회문제와 다양한 가치관, 소수를 위한 이야기를 다루는 백미경 작가는 어디서 흥미로운 글감을 찾을까. 신문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소식을 많이 접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하는 행동은 바로 상상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으면 우리의 문화 유산은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을까요? 백설공주가 일곱 난쟁이 중 잘생긴 애랑 눈이 맞는다면? 막상 왕자를 만났는데 상당히 폭력적이라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건 자의였을까 타의였을까? 이런 식으로 상상해요.” 백미경 작가는 세상이 참이라고 내세운 명제를 무조건 옳다고 믿지 않고, 그 의미를 비틀어내며 새로운 가상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에필로그
백미경 작가의 드라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힘쎈여자 도봉순>을 꼽았을 때, 그가 건넨 첫 번째 질문은 “기자님에게 <힘쎈여자 도봉순>은 로맨스예요, 히어로물이에요, 코미디예요?”였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어보는 질문이 돌아올 줄 알았건만 완전히 예상을 비껴갔다. 그런데 맞는 말이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로맨스이자 히어로물이고 코미디다. 어디 그뿐일까. 마지막 작품 <마인>도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블랙코미디에 로맨스, 추리물이기도 하다. 약간의 하이스트 무비적인 요소까지. 한 작품에 여러 색깔을 담는 것이 요즘 트렌드라 하지만, 백미경 작가는 더더욱 색다른 장르적 믹스 앤드 매치로 유연한 조합을 이뤄내는 데 능하다. 그러니 그는 작가이지만 조향사와 화학공학자 사이 어드메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긴다. 무슨 재료를 더할 때 어떤 화학반응이 생겨날지 예리하게 예측하고 과감하게 선택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리의 현실 속 변화를 이끌어내는 지반이 된다. 그가 작품을 통해 제시한 세상을 간접경험한 시청자들이 현실에 돌아와 낙차를 느끼고 더 좋은 세상을 꿈꾸면서, 마침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