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 이르기까지 마틴 맥도나는 영화에서 시대를 특정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기를 적시하길 피해가며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해온 편이다. 그렇기에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배경을 1923년이라 언급한 건 특기할 만하다. 아일랜드 국적의 감독이 아일랜드 내전이란 역사적 사건을 명확히 가리킨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장소는 본국과 거리를 둔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섬이다. 지척의 대포 소리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가운데 파우릭과 콜름은 이니셰린에서 둘만의 광기 어린 전쟁을 벌인다.
서부극의 특성을 즐겨 차용하는 마틴 맥도나의 특성은 그의 신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벨기에의 브뤼주, <쓰리 빌보드>가 미주리주의 에빙 지역으로 장소를 한정했던 것처럼 <이니셰린의 밴시>의 배경지도 이니셰린을 벗어나지 않는다. 섬에 머무르는 두 인물은 거듭해 갈등을 겪는다. <킬러들의 도시>나 <세븐 싸이코패스>에서처럼 갈등이 총격전으로 발현되진 않는다. 다만 파우릭과 콜름은 서로의 집과 술집을 오가며 담판을 짓고, 종국엔 서부극의 주인공처럼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로 찾아가겠다’고 예고하기에 이른다. 개인적인 복수극 또한 서부극에서 자주 발견되는 구조 중 하나다.
마틴 맥도나는 존 포드,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작품을 비롯한 서부영화들을 참고했으며 찰스 로튼 감독의 <사냥꾼의 밤>을 구체적인 레퍼런스로 언급한 바 있다. <사냥꾼의 밤>의 대표적인 장면 중 하나는 원경의 해리(로버트 미첨)와 근경의 쿠퍼 부인(릴리언 기시)을 한 프레임에 담아낸 신이다. 카메라를 집 내부에 위치시킨 뒤, 창을 통해 들여다보며 빈틈을 노리는 해리와 그런 해리의 습격을 막기 위해 총을 쥐고 앉은 쿠퍼 부인의 측면을 동시에 포착한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파우릭과 콜름이 화면에 처음으로 같이 잡힐 때의 구도도 이와 유사하다. 창으로 콜름의 동태를 살피는 파우릭과 그런 파우릭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담배 연기만 내뿜는 콜름. <사냥꾼의 밤>을 오마주한 이 장면은 반복해 등장하며 창문과 엇갈린 시선이 암시하는 단절의 징조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이니셰린에 밴시는 없다?
눈길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둘의 관계가 틀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콜름이 절교를 선언한 진짜 이유는 그가 “네가 싫어졌다”고 말한 때로부터 좀더 유예된 시점에 드러난다. “내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며 “남은 시간 동안엔 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될 음악을 작곡하고 싶다”고 콜름이 속내를 밝힌 것이다. 콜름은 파우릭과의 관계를 반드시 끊어내야만 음악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일까.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그가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 과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작곡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며 콜름이 “위대한 음악을 남긴 모차르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자 파우릭은 “난 모차르트 같은 사람은 모르고, 대신 다정했던 우리 부모님은 기억한다”고 받아친다. 콜름은 곧바로 “17세기 인물 중 다정함으로 기억되는 사람은 없다”며 다정의 우위에 놓인 예술의 생명력을 설파한다. 의견이 갈리는 사례가 다시 등장한다. 영화 제목인 ‘이니셰린의 밴시’는 본래 콜름이 작업하던 곡의 제목이었다. 밴시는 아일랜드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로 죽음을 예견하는 정령이다. 파우릭은 “이니셰린에 밴시는 없다”고 강조하지만 콜름은 밴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며 “이 곡이 너의 장례식에서 연주되는 상황을 생각해봤다”고 덧붙인다.
콜름은 언젠가 도래할 육신의 소멸을 두려워하며, 음악적 성취를 통해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콜름에게 음악은 자신의 실존적인 고민과 직결되지만 파우릭에겐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콜름만큼 죽음의 위협을 체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에겐 다정과 친절로 일군 현재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콜름은 과거 파우릭이 말똥에 관해 한참 이야기한 경우를 들며 “너와의 수다는 시간 낭비”라고 정의한다. 파우릭과 자신의 지향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 간격을 줄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콜름은 그와의 목적 없는 수다를 포기하고 작곡에 몰두한다.
흥미로운 점은 콜름이 파우릭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그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손가락을 끊어내면 그는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머뭇거림 없이 자해를 감행한다. 멀쩡한 나머지 손으로 곡을 쓸 수만 있다면 다른 손은 절단해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일까. 실제로 콜름은 악기를 연주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술집에서 음악인들이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순간, 남은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자리를 지킨다. 어쩌면 이것이 콜름이 바라는 미래일 것이다. 자신의 육신이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을 만큼 쇠할지라도 완성된 곡은 타인의 연주로 인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유의 초점이 사후의 미래에 닿아있는 콜름에게 유한한 신체는 상대적으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요소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같은 위협은 절교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여전히 신경 쓰는 파우릭의 ‘다정한’ 성정을 알기에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콜름보다 현재를 중시하는 파우릭이기에 자해까지 감행하겠다는 콜름의 선언은 충분한 위력을 발휘한다. 지향점이 엇갈리기에 성립되는 위협. 콜름을 연기한 브렌던 글리슨은 마틴 맥도나의 연출을 두고 “연민과 공감으로 무장한 채 끔찍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갈등이 남긴 질문들
콜름에겐 예술이, 파우릭에겐 다정이 일종의 양보할 수 없는 신념으로 자리한다. 각자가 옳다 여기는 신념을 굽히지 못하고, 그런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에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전쟁이 발발하는 경위와 이어지는 대목이다. 아일랜드 출신인 브렌던 글리슨이 “영화의 야만성이 본토의 일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언급한 데에 마틴 맥도나는 “파우릭과 콜름의 분열은 내전으로 인한 아일랜드의 분열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고 화답한다. 그러나 마틴 맥도나는 아일랜드 내전을 경유해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내기보다 그저 대립의 상황을 적시하는 데 그친다. 둘의 강경한 고집이 사태를 악화시켜가는 정황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한쪽 편을 들어준다고 가정하기도 어렵다. 반복되는 갈등은 몇 가지 질문을 남긴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은 무엇인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나갈 것인가. 그 질문의 방향은 오롯이 관객에게로 향한다.
이니시모어섬과 애칠섬, ‘이니셰린’이 된 장소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영화에서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이니셰린섬이 가상의 장소라는 점을 감안해 특정 장소로 구체화되지 않고 “신화적인 장소”로 남길 바랐다. 로케이션 헌팅 끝에 그 조건에 충족하는 곳으로 아일랜드의 골웨이만 입구에 있는, 세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아란 제도를 낙점한다. 마틴 맥도나는 “나의 아버지가 골웨이만 출신이었기에 이미 해당 지역이 익숙했다”고 한다. 제작진은 세개의 섬 중 이니시모어섬과 애칠섬을 오가며 촬영을 진행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마크 틸데슬리는 섬의 주민들이 돌을 쌓아 만든 벽과 그로 인해 조각보처럼 이어진 땅의 패턴을 눈여겨보았다. “대본에서 이 돌벽은 거의 미로와 다름없이 묘사된다.”(마크 틸데슬리)
파우릭과 시오반 남매의 집은 작품을 위해 특별히 제작됐는데, 외벽은 현지 석공들의 도움 덕에 진짜 돌을 활용해 지을 수 있었다. 파우릭의 집을 세트로 지은 덕분에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숏을 무리 없이 촬영할 수 있었다. 한편 콜름의 집은 오래된 어부의 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콜름의 집은 들어가는 순간 반 고흐의 그림과 같은 느낌이 풍긴다. 벽은 노랗고 밝고, 바닥은 돛천의 낡은 방수포로 인해 붉으며 천장은 검은색이다. 시대물치고는 매우 강렬한 컬러를 사용한 셈이다.”(마크 틸데슬리)
‘뮤지션’ 브렌던 글리슨
배우 브렌던 글리슨은 아일랜드의 악기인 피들(바이올린과 악기는 같지만 연주법이 달라 구분한다.-편집자)과 만돌린을 연주할 줄 아는 뮤지션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일랜드 민속음악에 관심이 많아 해당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 ‘알타’의 음반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영화 <마이클 콜린스> <콜드 마운틴> <그랜드 시덕션> 등에서 직접 피들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그는 단순히 연주만 하지 않았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카터 버웰은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브렌던 글리슨으로부터 “콜름이 연주할 곡을 나와 당신이 각각 쓴 뒤 더 좋은 곡을 선곡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버웰은 곧바로 수락했다. “브렌던 글리슨이 콜름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곡이 있다면 최대한 그를 존중하고 싶었다. 그의 연기에 방해될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프로젝트를 동시적으로 진행해야 했던 탓에 버웰은 결국 자신의 연주곡을 선보이지 못했다. 버웰은 브렌던 글리슨이 쓴 곡을 칭찬하며 “새 곡을 쓴다는 게 작곡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콜름이 파우릭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정말 잘 들어맞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